19일 미국 경제지 블룸버그에 따르면 소프트뱅크는 엔비디아를 대신할 수 있는 AI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1000억 달러(약 133조원) 투자를 유치할 계획이다. 블룸버그는 “소프트뱅크가 투자 유치에 성공하면 챗GPT 등장 이래 AI 분야에서 가장 큰 투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손 회장은 이번에 추진하는 AI 반도체 사업에 ‘이자나기’리는 프로젝트명을 붙였다. 이자나기는 일본 창세 신화에서 쌍둥이 남매와 결혼해 일본을 만든 최고신이다. 그만큼 손 회장이 AI 반도체 사업에 거는 기대감이 큰 것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손 회장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소프트뱅크 2023 콘퍼런스’ 행사 키노트(기조연설)를 통해 “일반인공지능(AGI)의 연산 능력은 인류 지능의 총합보다 10배 이상 뛰어날 것”이라며 “10~20년 뒤 현실화된 AGI가 인류를 선도하며 모든 산업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면서 “향후 기업 경쟁력은 AI를 받아들이는지 거부하는지에 따라 결정적인 차이가 날 것”이라며 “소프트뱅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AI를 활용하는 기업이 되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손 회장이 대규모 투자 유치에 나선 이유는 AI 반도체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엔비디아의 ‘대항마’를 키우기 위함이다. 챗GPT 등 초거대언어모델(LLM) 성능을 강화(학습)하거나 운영(추론)하려면 AI 반도체가 필수다.
엔비디아는 마이크로소프트(오픈AI), 구글, 메타 등 빅테크의 AI 인프라 투자 열풍에 따른 AI 반도체 수요 증가에 맞춰 공급을 크게 늘리며 강력한 독점체제를 구축했다. 시장조사업체 웰스파고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AI 반도체(데이터센터 GPU) 시장에서 엔비디아는 매출 기준 98% 점유율을 차지했다. 이러한 압도적인 성과에 힘입어 엔비디아 매출·영업이익은 지난 1년간 수직 상승했고 결국 지난 14일(현지시간) 시가총액 1조8200억 달러를 기록하며 구글을 제치고 전 세계 3위에 등극했다.
손 회장은 이자나기 프로젝트에 소프트뱅크 자금 300억 달러를 투자하고, 나머지 700억 달러는 ‘오일 머니’로 대규모 자본을 확보한 중동 투자자들을 통해 조달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받은 투자금을 소프트뱅크 자회사인 반도체 설계기업(팹리스) ARM에 지원하거나 새 AI 반도체 기업 설립에 활용할 계획이다. ARM은 이미 ‘온 디바이스 AI’ 추론에 특화한 AI 반도체 ‘에토스 NPU’를 개발한 바 있다. 온 디바이스 AI란 인터넷 연결 없이 기기에서 즉시 생성 AI 서비스를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AI 업계에선 위워크 등에서 큰 실패를 맛본 손 회장이 포기하지 않고 AI 반도체에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손 회장 계획이 현실화하면 신규 AI 반도체 기업은 오픈AI의 10배가 넘는 돈을 갖고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된다. 자본력으로 엔비디아에 결코 뒤지지 않는 새 AI 반도체 기업이 등장하는 것이다.
◆7조 달러 유치해 AI 반도체 만든다···챗GPT 아버지의 미래 구상
AI 반도체 사업에 관심을 보내는 AI 업계 거물은 손 회장 말고도 많다. 대표적인 인물로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챗GPT를 운영하면서 AI 반도체 도입·운영에 큰 비용이 필요한 것을 실감하고 AGI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독자적인 AI 반도체 개발이 필수라고 강조한 바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9일(현지시간) “샘 올트먼이 오픈AI AI 학습·추론에 쓸 AI 반도체를 직접 만들기 위해 5조~7조 달러(약 6600조~9300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 유치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전 세계 반도체 시장 전체 매출액이 5270억 달러(약 701조원)였던 점을 고려하면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투자 모집이다.
올트먼은 이 돈으로 엔비디아를 대체할 수 있는 AI 반도체 기업(팹리스)과 생산 시설(팹)을 만들 계획이다. 이러한 천문학적인 자금 역시 중동 오일머니에서 조달한다. 이를 위해 올트먼은 지난해 11월부터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지역을 순방하며 투자자들을 만나고 있다.
AI 반도체 팹리스와 팹을 함께 만들겠다는 올트먼의 계획은 미국에 반도체 생산 거점을 만들겠다는 바이든 정부의 뜻과도 일치한다. 올트먼은 AI 반도체를 만드는 것에 대한 정부 허가를 얻기 위해 이달 초부터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을 포함한 미국 정부 관계자와 유력 국회의원을 만나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이를 두고 블룸버그는 “올트먼의 AI 반도체 사업 구상은 국가 안보 위협과 반독점법 위반 문제 등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며 “미국 정부 승인이 없으면 관련 사업을 전개할 수 없는 구조”라고 분석했다.
올트먼의 오픈AI와 그 투자자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해 엔비디아의 AI 반도체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들인 고객이기도 하다. 이러한 1등 고객이 이탈하려는 움직임에 엔비디아는 직접적으로 불편한 심경을 내비쳤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지난 12일 UAE 두바이에서 열린 2024 세계정부정상회의에서 “AI를 위해 하드웨어(AI 반도체)를 더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며 “(AI 반도체의) 컴퓨팅 성능이 더 빨라지고 있는 만큼 (AGI 개발에 필요한) 컴퓨팅 자원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픈AI의 독자적인 AI 반도체 개발 행보를 경계하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손 회장과 올트먼 CEO가 AI 반도체 개발을 위한 투자 모집에 나섰지만 계획이 현실화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시장에선 벌써부터 “타도 엔비디아”를 외치며 독자 개발한 AI 반도체를 출시한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업계에선 가장 주목해야 할 회사로 AMD를 꼽는다. 엔비디아 AI 반도체 핵심 경쟁력은 매개변수(파라미터)가 1000억개를 넘는 생성 AI를 빠르게 학습·추론할 수 있는 강력한 ‘성능’에 있다. 한국 스타트업의 국산 AI 반도체(K-AI 반도체)를 포함해 전 세계 그 어떤 회사의 AI 반도체 성능도 엔비디아 제품에 미치지 못한다.
AMD는 조금 다르다. 20년 넘게 엔비디아와 소비자용 GPU(그래픽처리장치) 시장에서 겨룬 기술·노하우를 바탕으로 엔비디아의 AI 반도체(데이터센터 GPU)에 버금가는 AI 반도체를 만들 역량이 있는 회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오는 3월 AMD가 델·HPE·레노버 등 서버 업체들을 통해 시장에 정식 출시하는 신형 AI 반도체 ‘인스팅트 MI300 시리즈’는 엔비디아 구형 AI 반도체 ‘A100’을 뛰어넘고, 주력 AI 반도체인 ‘H100’에 버금가는 학습·추론 성능을 갖춘 것으로 공인받았다. 이러한 기대감에 AMD 주가도 지난 1월 주당 180달러에 도달하며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특히 AMD는 AI 반도체를 관리할 중앙처리장치(CPU) 설계 능력이 부족한 엔비디아와 달리 독자적인 CPU 설계 능력을 갖추고 있어 1개의 CPU와 3개의 AI 반도체를 합친 독자적인 구조의 AI 반도체로 올해 승부수를 띄울 것으로 알려졌다.
CPU 설계 능력 없이 AI 반도체(GPU 포함) 설계 능력만 갖춘 것은 중요한 순간마다 엔비디아의 발목을 잡았다. 젠슨 황 CEO도 이점을 잘 알고 있어 과거 AMD·ARM 인수를 시도하며 독자적인 CPU 설계 능력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반도체 시장 독점 우려를 넘지 못하고 매번 고배를 마셔야 했다.
엔비디아·AMD에 팹리스 제왕 자리를 뺏긴 인텔도 신형 AI 반도체를 선보이며 '와신상담'하고 있다. 미국 연구소에서 자체 개발한 ‘데이터센터GPU맥스(구 제온파이)’와 이스라엘 AI 반도체 스타트업을 인수해 만든 ‘가우디’로 AI 반도체 이원화 전략을 펼치고 있다. LLM 학습·추론 성능은 엔비디아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림·영상 생성 AI 학습·추론 성능은 엔비디아에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으며 미국 정부의 수출 금지로 인해 엔비디아 AI 반도체 구매가 막힌 중국 IT 기업들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퀄컴은 2009년 AMD에서 GPU 설계 기술을 사들이며 AI 반도체 시장에 진입했다. 다만 저전력을 강조하는 퀄컴의 AI 반도체는 전력을 많이 소모하더라도 AI 모델 학습·추론 성능을 끌어올리는 현행 AI 반도체 시장 흐름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퀄컴은 데이터센터에서 온 디바이스 AI로 AI 반도체 전략을 수정하고 관련 기술 개발·마케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구글·메타 등 소프트웨어와 클라우드에 집중하던 빅테크도 자체 AI 반도체 개발에 합류했다. 하지만 AI업계에선 이들의 AI 반도체 개발을 두고 의구심 섞인 시선을 보낸다. 이들이 진심으로 엔비디아 AI 반도체의 대안을 만드는 게 아닌 ‘슈퍼 을’인 엔비디아와 AI 반도체 공급 협상에서 우위를 되찾기 위해 AI 반도체 개발에 나섰다는 것이다.
다만 이들 업체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AI 반도체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압도적 우위는 당분간 변함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AI 모델 개발 생태계가 이미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굳어진 데다 ‘GH200’ 등 엔비디아의 신형 AI 반도체 출시도 예고돼 있어 성능 면에서도 격차가 다시 벌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웰스파고리서치는 “경쟁자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엔비디아의 올해 AI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매출 기준 94~96%에 달할 것”이라며 “점유율 감소는 소폭에 불과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