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발명이 아니다. 발명은 과거에 전혀 없었던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반면 혁신은 이미 존재하는 노동과 자본 혹은 정보 등을 더 가치 있는 재화나 서비스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놀라운 무언가를 마주하는 결과는 발명과 혁신이 유사해 보이지만 영예나 경제적 이득을 얻는 쪽은 혁신가인 경우가 많다.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된 증기기관도 토머스 뉴커먼이 발명했지만 역사에 기록된 주인공은 제임스 와트인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게다가 혁신은 특정 주체 혼자만의 노력으로 성공할 수 없다. 수많은 창업 영웅담에도 불구하고 혁신에 '외로운 천재' 신화는 작동하지 않는다. 협력과 공유 없이 혁신은 불가능하다. 혁신 과정 전체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모두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기술적 돌파구를 찾아내고, 다른 누군가는 실용화할 제조법을 찾아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결과물을 저렴하게 만들어 상용화할 방법을 알아내는 식이다. 지구상 어딘가에 발명과 혁신이 모두 가능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 아이디어 역시 이전 세대에 빚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혁신을 구현하는 지식은 누군가의 머릿속이 아니라 머리와 머리 사이에 저장돼 있다.
이런 이유로 혁신은 결코 민간만의 노력으로 이뤄질 수 없다. 언젠가부터 공공은 느리고 관료적인 반면 민간은 역동적이며 혁신적인 주체로 이분화돼 왔다. 시장에서 정부 역할은 최소화돼야 한다는 논리는 상식처럼 이해돼 왔다. 정부는 교육이나 연구 같은 보조적인 역할에 충실하고 나머지는 민간기업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시도했다가 실패한 많은 사례는 국가가 민간보다 혁신 역량이 뒤처진다는 근거로 삼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국가 실패는 대부분 민간보다 훨씬 어려운 목표를 설정한 탓에 일어난다. 벤처 투자만 보더라도 목적이 다르다. 공공벤처는 민간 자본보다 더 고위험 분야에 투자하며, 미래 수익에 있어 낮은 기대치를 두는 인내자본의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혁신 과정에서 민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글과 아마존의 노력이 없었다면 디지털 경제는 우리 삶에 이렇게나 가까이 위치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혁신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이 규제하고 통제하는 역할로만 비친다는 점이다. 빅테크 기업은 몇몇 천재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듯하지만, 구글 성공의 바탕인 알고리즘이 국립과학재단 지원금으로 개발되고 생명기술 기초인 분자항체는 영국 공공의학연구심의회 연구실에서 발견됐다는 점은 간과된다. 불확실성이 높고 변화가 빠른 디지털 시대의 혁신을 위해서는 정부와 민간의 역할 구분과 시너지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디지털 시대 경쟁우위를 위해서는 데이터 공유 분야에서 정부와 민간의 역할 구분이 중요하다. 민간은 데이터가 있어도 기업 간 공유를 하지 못한다. 혁신은 협력하고 공유할 때 성공에 가까워지지만, 나만 양질의 데이터를 제공해 손해볼까 봐, 데이터를 통해 전략이 노출될까 봐, 갑을 관계를 이용해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데이터를 확보 가능하다는 이유로 데이터를 공유하지 않는다. 용의자의 딜레마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각자 이익을 위해 최선의 의사 결정을 하지만 균형은 언제나 차선이다. 디지털 경제판 시장실패다.
정부는 이 지점에 개입해야 한다. 데이터 공유 범위와 접근 권한, 수익 창출 원칙을 정하며 기밀성과 투명성 확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특정 기업이 데이터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제도도 포함된다.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다양한 산업 부문에서 자율적으로 데이터 거래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인터넷 공간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활발하게 거래할 수 있는 이유도 정부가 거래의 규칙을 발 빠르게 마련한 덕분이다.
이제는 데이터다. 각 기업이 데이터 공유로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신뢰를 제도적인 차원에서부터 구축해야 한다. 유럽은 이미 가이아(GAIA)-X라는 분산형 데이터 공유 방식에 따라 다양한 분야의 산업 데이터가 교환될 수 있는 원칙을 마련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 모빌리티 데이터 공유 생태계인 카테나(Catena)-X에서는 완성차 업체인 BMW와 화학산업 대표인 BASF가 서로 데이터를 교환한다. 유럽 기업들은 대인배이고, 우리 기업들은 옹졸해서 데이터 공유와 협력 수준이 다른 것이 아니다. 유인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제도적 신뢰를 기반으로 혁신 과정에 다양한 주체가 모이도록 생태계를 만들었다.
과거 제조 시대에는 연구개발(R&D)만으로 경쟁우위가 가능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혁신 과정 없이 R&D 결과물을 수익으로 전환할 수가 없다. 연구혁신(R&I)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개발에 그치지 말고 혁신 과정에 대한 깊은 고민을 병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역사적으로 수익은 발명가보다 혁신가의 몫이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국가라고 다르지 않다. 저성장 시대 발명가 국가가 아닌 혁신형 국가가 절실한 이유이다. 기업과 정부 모두 R&D를 넘어 R&I 중심의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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