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튀르키예)에 가보면 식당 같은 곳에 있는 시계들이 낮이나 밤이나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어서 처음엔 당황하게 된다. 곧 그것이 튀르키예인들이 국부로 추앙하는 케말 아타투르크(튀르키예의 아버지 케말, 1881~1935)가 사망한 시각임을 알게 된다. 튀르키예에서는 물론 아타투르크의 초상화, 동상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높이가 35m인가 된다는 모택동의 두상이 있는 중국 후난성 창샤의 광활한 모택동기념관에는 사시사철 참배객들이 밀려든다. 케말 아타투르크는 위대한 인물이었으나 심각한 과(過)도 적지 않았고, 모택동은 나의 견해로는 중국민에 재앙이었다. 어쨌든 두 인물 다 이승만에 못 미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아무튼 국부를 기리는 국민은 좋은 아버지를 차지한 행운아이다. 우리나라에는 근세사에서 ‘국부’라고 불릴 만한 유일한 인물인 이승만 대통령을 철저히, 사악하게, 비열하게, 파괴하고 비하해서 자라나는 세대가 그를 철저히 외면하고 증오하도록 공모한 악랄한 무리들이 있다. 그들 때문에 우리 국민은 감싸 줄 어버이가 없는 처량한 고아가 되었다.
이 사악한 무리들의 회심의 역작(?)이 ‘민족문제연구소’라는 허울 좋은 단체가 만들었다는 ‘다큐멘터리’ 아닌 드라마 '100년전쟁'이다. 그들의 공작의 수법을 규명해 보려고 그 역겹고 소름 끼치는, 사악한 제작물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다큐멘터리’가 사실을 추적하고 밝혀내서 수록하는 영상기록물이니까 이 영상물은 전혀 ‘다큐’가 아니다.
이 영상물에는 20세에 처음 서양문물을 접하고 조선의 백성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독립협회에서 열정적 민중연설을 통해 국민에게 개화의 열망을 고취했던 청년선각자, 일생을 일제의 한국 지배의 부당성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독립운동가, 세계 절대강국 미국에 존망을 의존하는 약소국의 리더이면서도 미국에 당당히 맞서서 뚝심으로 무리한 요구도 관철시켰던 의지의 사나이 이승만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갑자기 맞은 해방정국에서 공산주의를 배제하고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설립하기 위한 그의 전방위 노력, 그리고 건국 후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나라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교육을 일으키고 산업의 토대를 마련하고 국방력을 구축하고 원자력 역량도 도입하려고 그토록 애썼던 건국대통령. 그 경이적 인물, 거인을 이 영상물은 마구 난도질해서 알아볼 수 없게 일그러뜨렸다.
이 영상물 속의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찬양하고 정당화했던 민족반역자, 미국에 빌붙어서 국내정치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 했던 굴신과 아첨의 화신, 게다가 일생 그가 관계한 모든 기관과 단체의 공금을 횡령해서 일신의 사치와 방탕에 쓴 방탕아이다. 심지어는 자기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은 자객을 보내어 암살하려했던 조폭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 영상물은 이승만이라는 인간을 알아보기 위해서 수많은 국내, 국외 이승만 전문가 학자, 언론인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의 증언도 구하지 않았고 극좌의 얼굴 2인에게 사악한 거짓증언을 맡겼다.
이 영상물은 시작부터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를 보여주면서 이승만이 한국의 괴벨스라고 은근히 시사하고, 나치 점령 당시의 프랑스 민중의 영상은 이승만이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의 '콜라보'들의 괴수 같은 존재라는 암시인 듯하다. 이 영상물에 의하면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이승만이 초대대통령으로 추대된 것은 요인들 중에 기호파-개신교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하고많은 기호파 인물들 중에서 왜 이승만이 선택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승만이 20세부터 20여 년간 구축한 천재, 대중연설가, 개화사상의 리더, 그리고 미국 명문대 박사로서의 명성 때문이 아닌가?
이 영상물은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주장을 요상한 영상으로 분위기를 만들어 떠안긴다. 그래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아리송한 말이 화면에 크게 뜨고 이승만의 ‘상상을 초월하는’‘비행’이 나온다. 그리고 이승만이 백인여자들에게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사주며 유혹했다고 거듭 주장하는데 그때마다 가무영화 같은데 나오는 카바레 무희들의 모습이 화면에 일렁인다. 이승만을 모사꾼 또는 깡패로 중상모략 할 때는 ‘대부’의 말론 브랜드 얼굴이 비친다(세번이나). 서부극 ‘석양의 무법자’의 화면과 불길한 음악, ‘플레이보이’지 표지에 이승만 사진을 넣은 영상 등이 모두 이승만을 부도덕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동원된 기법이다. 이승만 대통령 사진의 한쪽 입 꼬리를 치켜 올라가게 포샵을 해서 그가 동포들의 독립을 향한 노력을 모두 비웃고 이용했다고 시사하고 있다. 이승만이 해외 한인들 앞에서 일제에 고문을 당한 듯이 손끝을 불었다면서 그의 얼굴 앞에 오그린 손을 넣은 사진도 등장한다. 이 영상물의 ‘조작’의 정점은 이승만 대통령이 김노디라는 자기 제자와 미국 본토에서 기차여행을 하다가 맨 법령(Mann Act) 위반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면서 마치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경찰이 피의자를 검거할 때 반드시 찍는 머그샷(mug shot, 피의자 사진공개)이 찍혀서 미국정부 파일에 보존되어 있는 양 제시한 것이다. 이 사진은 전혀 미국 경찰에 찍힌 일이 없고 따라서 미국 경찰의 파일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사진을 조작해서 이승만 박사가 누가 보아도 불륜으로 보이는 여행을 젊은 여자와 했다는 ‘증거’인 양 제시했는데, 2018년 한국의 법정은 그런 사진조작이 ‘예술적 자유’에 속한다고 판결했다. (2018년 9월 4일자 필자의 조선일보 칼럼 ‘타인의 명예로 예술적 유희를?’ 참조) 이 영상물은 이승만 박사의 미국 아이비 리그 세 대학에서 받은 학사, 석사, 박사 학위가 기독교단의 힘으로 엉터리로 얻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이 안 되어서 프린스턴 대학으로 옮겼다는 말도 참으로 무식한 말이고 하버드대학이 생도의 사정을 보아서 학위를 발행했다면 하버드의 명성이 오늘날까지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돈을 밝히고 어느 단체나 관계하게 되면 돈을 횡령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되는 한 가지 사례만 들겠다. 이 대통령은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1933년에 방문했던 제네바의 호텔러시아 식당에서 좌석이 모자라서 프란체스카 여사 모녀와 합석했는데 그때 메뉴에서 가장 싼 음식인 양배추절임과 소시지 한 개, 감자 2개를 시켜먹더라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회고한다. 결혼을 해 보니 이 대통령은 미국 내,외에서 외교활동을 위한 자금이 늘 부족했기 때문에 체면상 호텔은 점잖은 곳에 투숙했으나 생달걀로 끼니를 때우고 사과나 바나나 하나로 하루를 나기도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된 후 경무대 안에서도 프란체스카 여사가 덕지덕지 기워 주는 내의를 입었고 하와이에 망명했을 때는 입원비를 낼 수 없어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그 병원에 간호원으로 취직해서 그 월급으로 충당했다지 않는가. 그가 귀국한 후 숙소 때문에 고생을 하니 사업가 수십인이 돈을 모아서 그에게 이화장을 선사했는데 이화장은 겨울에는 냉동실처럼 춥고 매우 생활하기 불편한 곳이었다고 한다.
하와이에서 공금을 횡령해서 부동산투기를 했다는 주장은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에 나오는 하와이 교민들의 회고와 증언과 완전히 배치된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민족을 이끌어서 교육사업으로 교민들의 자립기반을 마련했다. 우리 민족이 더 나은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민도가 높아지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이승만은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윤봉길 의사나 이봉창 의사 류의 ‘거사’ 역시 무참한 보복을 불러오니 자제를 희망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개척하려 한 외교 역시 나라 없는 무국적자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다. 강대국들을 말과 글로 설득해야 하는데 논리적, 심정적으로 공감을 얻더라도 강대국들에게 자신의 이익을 제쳐놓고, 또는 그에 위배되는,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이 수용될 수 있겠는가? 이승만은 절대적인 약자로 외교활동을 했지만 그가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해서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은 벅찬 보람이었다. 또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는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일본계 미국인들이 혹시 반미행위를 할까봐 집단 수용소에 강제 수용했는데 재미 한국인도 법적으로는 일본인이었기에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었지만 이승만이 한국인은 일본인과 다름을 누누이 해명해서 재미 한국인은 수용소에 수용되는 것을 면했고 일본계와는 달리 미국 군대에 입대해서 참전할 수 있었던 사실(이주영, <이승만평전>)도 이 영상물은 전하지 않는다. 아마 알지도 못했을 것 같다.
요즘 김덕영 감독의 다큐영화 '건국전쟁'이 히트를 쳐서 이승만에 대한 인식이 바로잡혀 가니까 어떤 유튜버 학원강사가 이승만의 25개 ‘비행’을 나열하면서 이승만은 악당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암살한 전명환의 변호를 돈을 더 요구하면서 거절했다느니 하는 따위의 주장들이 얼마나 잘못된 사료, 문서의 맹랑한 오독(誤讀)에 기초한 것인가를 조선일보의 박종인 기자가 유튜브와 지면을 통해서 조목조목 명쾌, 통쾌하게 반박하고 있다. 문제의 유튜버가 역사가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학습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이승만을 공부하면 우리의 파란만장한 근대사를 알게 되고 민족적 열등감이 크게 해소된다. 그의 긴 생애 동안 우리 민족이 잘 되기를 그토록 염원했던 거인이 있었음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마음 든든한가.
▶이화여대 영문학과 학사 ▶미국 웨스트조지아대학 영문학 석사 ▶뉴욕 주립대학 영문학 박사 ▶1974년 이래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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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눈물 나네요. 이승만 대통령은 6.25. 때 김일성한테 항복을 하지 않은 사실만으로도 위대하다고 존경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