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4‧10 총선 10대 공약 중 최우선 과제로 제시한 게 저출생 문제다. 국민의힘도 민주당도 OECD 국가 최저인 0.78명의 출생률로는 국가의 미래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경쟁하듯 내놓은 대응책도 파격적이다. 국민의힘은 부총리급 인구부를 설치하고, 육아기 유연근무를 기업문화로 정착시키기로 했다. 남성 배우자의 출산휴가도 1개월로 의무화했다. 민주당도 저출생 대응 특별회계를 만들고, 아빠 1개월 유급휴가, 자녀 수에 따른 분양 전환 공공임대 아파트 제공, 자녀가 18세 될 때까지 월 20만원 아동수당 지급 등을 약속했다.
마침 국회 입법조사처(처장 박상철)도 지난 11일 저출생 대응책 마련에 도움이 될 만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지방 소멸 대응책으로 도입된 생활인구 제도의 현황과 과제’(하혜영·임준배)라는 제목의 이 페이퍼는 ‘생활인구’라는 개념(모델)을 활용해 인구 감소 문제에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저출생은 인구 감소-지방 소멸을 낳고, 지방 소멸은 다시 인구 감소-저출생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기에 어떻게든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고심의 산물로 보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생활인구’였다. ‘생활인구’란 한 지역의 인구를 파악할 때 주민등록상 인구뿐만 아니라 통학, 근무, 관광, 휴양 등을 목적으로 일시 체류하는 사람들도 포함하는 인구를 말한다. 인구 기반을 넓고 유연하게 상정함으로써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도 막아보자는 거다. 한국은 2022년 6월 ‘인구감소지역 지원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생활인구’ 모델을 도입했다. 정부는 2024년까지 총 89개의 인구 감소 지역에 ‘생활인구’ 모델을 적용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작년부터 시행 중인 ‘고향올래(GO鄕 ALL來)' 5대 사업인 △두 지역 살아보기 △로컬유학 생활 인프라 조성 △은퇴자 공동체 마을 조성 △청년 복합공간 조성 △워케이션(worcation‧일과 휴가의 합성어)은 대표적인 ‘생활인구’ 늘리기 사업이다.
일본은 2010년대 초반부터 ‘생활인구’와 비슷한 ‘관계인구’ 개념을 내세워 지방 인구 감소에 대응해왔다. ‘관계인구’는 정주인구(주민등록상 인구)나 관광차 방문한 교류인구와는 다르다. ‘특정 지역에 계속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관계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을 늘려 인구 감소를 막아보자는 거다. ‘관계인구’는 다카하시 히로유키(高橋博之)가 저서 <도시와 지방을 섞다-다베루 통신의 기적>에서 “교류인구와 정주인구 사이에서 잠자고 있는 ‘관계인구”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처음 쓴 것이라고 한다.
인구지리학자도 아닌 필자가 ‘생활인구’ 또는 ‘관계인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선거 때문이다. 더 지켜봐야겠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생활인구’ 대목에서 이번 총선이 그나마 ‘막말선거’에서 ‘정책선거’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 차원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정책선거’의 흔적이라도 발견한 느낌이었다.
선거판을 따라다니던 햇병아리 기자 시절부터 선배들에게 귀가 아프도록 들은 말이 있다. '경마식 보도(horse-race journalism)를 지양하라'는 충고였다. 공약과 정책에 대한 심층적 분석 대신 몇 번 경주마가 앞서고 있는지, 뒤지고 있는지 하는 식으로 보도하지 말라는 것.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늘 고민했는데 요즘은 ‘막말’을 놓고 똑같은 고민 중이다. 자고 일어나면 막말 논란이 터져 나와 막말을 경마식으로 보도하기에 정신이 없을 정도다.
양상도 사뭇 달라졌다. 디지털 시대답게 요즘은 아무리 오래전에 한 말도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드러난다. 한번 뱉은 말은 영원히 부인도 변명도 할 수 없게 됐다. 막말은 막말을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당(黨)은 물론 우리 정치에 회복하기 어려운 부담을 안긴다.
막말을 한 공천 내정자를 바꿀 것인가, 말 것인가, 여당은 바꾼다는데 야당은 왜 안 바꾸는가,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왜 안 봐주는가, 단순 징계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대권 가도에 장애물로 인식돼 내쳐지는 것인가, 그 파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같은 당내에서도 당직자들끼리 생각이 다르다. 5‧18을 폄훼한 후보는 즉각 공천이 취소됐는데 천안함 피격사건을 두고 막말을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없어 유가족들이 울분을 토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막말의 분노가 가리고 있는 것들
막말의 폐해 중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 자극적 막말이 낳은 분노와 혐오에 매몰돼 정작 따져봐야 할 문제들은 그냥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톺아볼 필요가 있어서다. 예컨대 막말 차원을 벗어나 일관되게 반국가적 이념 지향을 보여 온 사람이나 세력이 있다면 그들이 의도했건 않았건 간에 막말 논쟁으로 인해 이런 사실들이 혹여 가려지는 것은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철지난 색깔논쟁을 하자는 게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동료시민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책임과 의무다.
국내 진보세력의 맥을 이어온 NL계 중추 통합진보당(통진당)은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됐다. 그럼에도 일부 잔존 인사들은 여전히 활동 중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통진당 해산 이후 진보 진영은 정당, 노조, 사회단체 등 3축이 모두 특정 지역, 특정 세력에 의해 장악됐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정통, 전통 민주당의 정신과 철학, 민주화를 위한 긴 투쟁의 시간들이 이들 진보 진영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누군가는 이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한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이념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지, 아니면 다른 원대한 꿈이라도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요즘 위성정당 비례대표 후보자들의 면면을 보면 한때 반미(反美)를 외치고 미군 철수를 주장했던 이력쯤은 흔해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다. 한국 사회는 그만큼 성숙해지고 유연해진 것인가.
다시 정책으로 돌아가자. 필자는 과문한 탓에 ‘생활인구’ ‘관계인구’ 개념에 대해 뒤늦게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사례들이 널렸을 것이다. 안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점검하고 평가해야 할 공약과 현안들은 차고도 넘친다. 선거란 온 국민이 공부하는 학습의 시간이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 더 나은 정책과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모든 선거의 본령이고, 이번 선거는 더욱 그렇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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