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총선의 막이 올랐다. 여야 예상 의석수와 승패 등을 놓고 전망이 분분하다. 이른바 ‘정부 지원론’과 ‘정부 견제론’이 맞서고 있다. 어느 쪽이 이기든 총선 후 정국은 극심한 국정의 체증(滯症) 또는 밀어붙이기식 독주(獨走)를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야는 이미 공천 과정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막말과 증오의 표출로 충분히 예열돼 있는 상태다. 경쟁과 투쟁은 정치에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거라고 하지만 우리는 너무 심하다.
양극단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해줄 세력도 기제도 없다. 개혁신당, 새로운 미래, 조국혁신당 등 일종의 파생 정당들이 있다지만 이들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기는 무리다. 어떤 정당은 순전히 개인의 방탄과 신원(伸冤)을 목적으로 급조되기도 했다. 의원 꿔주기 위성 정당으로 언제든지 본체에 합류할 정당도 있다. 어느 새 이게 우리 정치의 풍경이고 일상(日常)이 됐다. 세계 10위권 선진국이라지만 정치는 늘 우리를 참담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한국 정당정치의 출발점을 1945년 9월 16일 한민당의 결성으로 본다면 우리 정당사도 어언 한 세기가 다 되어간다. 그럼에도 민주적 정당정치의 핵심인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합의의 미덕과 지혜는 여전히 멀리 있다. 품격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정치 특유의 비타협성, 증오, 불화, 한마디로 뭉뚱그려 후진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념과 역사, 정치인 개개인의 자질, 권위주의적 정치문화 등 정치학개론을 여러 권 써야 할 만큼 원인은 많다.
윤 대통령을 잘 아는 전직 법조인에게 물었다. 그런 식으로 양자 간 회담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느냐고. 답은 “절대로 아니다”였다. 그 이유를 짐작할 만했다. 그건 정치지도자를 떠나 개인으로서 정체성(正體性‧identity)과 가치(價値)에 관한 문제였다. 이 문제는 아마도 이 대표에 대한 사법 리스크가 해소되거나 관련 재판이 마무리되어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상사에서도 그렇지만 ‘인정의 부재’는 반발과 증오심을 키움으로써 관계를 더 소원해지게 만든다. ‘엇나간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들어맞는다.
이 대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골적으로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암시했다. 사용한 언어도 직설적이었다. “대통령이 말을 안 들으면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가 “내쫓아야 한다” “중도해지해야 한다”고 갈수록 수위를 높였다. 이런 발언으로 지지층을 결집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냈을지는 몰라도 정도는 아니다. 필자가 보기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과연 대통령과의 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하버드대학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가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2018년 어크로스)>를 다시 보자. 그들에 따르면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것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설계한 헌법 시스템 덕분만은 아니다.
“두 가지의 기본적인 규범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미국 사회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 두 가지 규범이란 정당이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과 이해(understanding), 그리고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forbearance)를 말한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대통령이든 야당 대표든 누구든 경청해야 할 경구가 아닐 수 없다. 내친김에 조금 더 인용해보자.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이 두 규범은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 민주주의 기반을 강화해왔다. 양당의 지도자는 서로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였고, 그들에게 시한부로 주어진 제도적 권리를 오로지 당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관용과 절제의 규범은 미국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연성(軟性) 가드레일로 기능하면서, 당파 싸움이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반면 1930년대 유럽이나 1960년대와 1970년대 남미에서 나타난 자멸적인 당파 싸움은 여러 국가의 민주주의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우리에게도 ‘연성 가드레일’이 있는가. 윤 대통령이나 이 대표 모두 겸허히 자문해야 한다.
다시 ‘현실’의 영역으로 돌아가자. 두 사람 간 대화가 어렵다면 우회하는 방법이라도 찾아야 한다. 이런 제안에 발끈할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지금이 제왕적 대통령의 시대도 아니고 야당 대표가 만나자고 하면 선뜻 만나야지” 하면서 말이다. 그에 대한 반박도 차고 넘칠 것이기에 서로 ‘절제’하고 ‘상호 관용’의 자세로 해법을 모색해보자.
필자는 이 대표가 꼭 대통령을 직접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국민의힘 대표와 일대일로 여야 대표회담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굳이 격식이 필요하다면 그 회담을 ‘영수회담’이라고 부르면 될 일이다. 그 모습이 오히려 대통령과 집권 여당에 줄 압박은 상당하지 않겠는가. 꼭 그걸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런 자세와 제안만으로도 의미가 클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막말정치로 시작되는 한국 정치의 퇴행과 후진화(後進化)를 막아야 한다.
얼음은 위에서부터 녹는다고 했다. 여야가 영수회담 또는 여야 대표 회담을 통해 막말정치의 근절을 선언하고 구체적인 실천 강령을 제시한다면 저 아래 지구당까지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뀔 것이다.(이럴 때는 중앙집권제의 유산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고맙다)
막말정치로 한국 정치를 4류로 전락케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야 가릴 것 없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22대 총선을 그 출발점으로 삼자. 이 대표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먼저 만나자고 제안했으면 한다. 한국 민주주의를 죽음으로 내몰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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