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걸친 옷, 그가 든 가방, 그가 착용한 시계. 특별한 사람은 내뱉는 숨소리까지 명품 같아 보일 때가 있다. 사물도 마찬가지다. 무심히 꽂힌 우산, 덩그러니 놓인 시계, 회전하지 않는 휠 캡까지... 특별한 자동차가 내뿜는 공기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는 데 우연은 단 한 줄도 없었어."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에 시달린 문동은(송혜교 분)이 오랜 기간 복수를 다짐하며 마침내 가해자에게 내뱉는 말이다. 그렇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마침내 결과에 이르기까지 단 한 치의 우연도 허용하지 않는 것. 명품이 명품인 이유다. 숨소리까지 특별한 차, 주인이 아닌 자동차가 주인을 결정하는 차. 상위 0.1%의 자동차로 불리는 '롤스로이스' 얘기다.
◆영국 왕실 의전 차량 서열 1위... 롤스로이스의 탄생
태생부터 콧대가 높았던 롤스로이스는 귀족 집안 출신으로 명품을 알아보는 탁월한 눈을 가진 찰스 롤스와 가난한 제분업자 집안에서 태어난 천재 엔지니어 헨리 로이스가 만나 1906년 영국에서 탄생했다. 자동차 업계 최상의 조합인 딜러와 개발자의 만남인 셈이다.
그러나 찰스 롤스는 롤스로이스가 성장가도를 달리던 1910년 갑작스러운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헨리 로이스는 단념하지 않고 계속해서 디자인과 품질 개선에 힘썼고, 실버고스트, 팬텀 등 롤스로이스의 대표작을 출시하며 비즈니스를 확장했다. 헨리 로이스는 1930년 자동차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준남작 지위를 받고, 1931년에는 경쟁사 벤틀리를 인수하기도 했다.
롤스로이스는 자동차뿐 아니라 비행기에도 관심이 많아 항공 엔진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고, 1973년 자동차 부문을 독립된 회사인 롤스로이스 모터카로 발족시켰다. 이후 롤스로이스 모터카는 빅커스(Vickers PLC)에 합병됐고, 롤스로이스 이름에 관한 권리는 항공엔진회사 롤스로이스 PLC가 계속 유지하다 1998년 BMW그룹에 인수됐다. 롤스로이스는 지난 100여 년간 세계 자동차 업계 최정상 자리를 고수해 왔으며, 이 기간 동안 생산된 차의 60% 이상이 아직 운행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고속 주행도 유령 걸음처럼 고요하게... 등장부터 찬란한 '실버 고스트'
롤스로이스의 대표작인 '실버 고스트'는 고작 브랜드 설립 1년 만인 1907년 탄생해 그해 세계 최고의 차로 인정받았다. 아무리 속도를 높여 주행해도 차 내부에 있는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더 크며, 찻잔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우아하고 부드럽게 달려 '은빛 유령'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후 생산된 팬텀 시리즈는 롤스로이스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팬텀Ⅰ은 실버 고스트에 오버헤드 밸브 엔진을 장착해 성능을 개선했으며, 보어와 스트로크를 늘려 배기량을 키웠다. 알루미늄 실린더 헤드, 4륜 서보 브레이크 시스템, 유압식 쇼크업소버(충격완화장치) 등은 팬텀 Ⅰ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후 팬텀 Ⅱ, 팬텀 Ⅲ 등 뛰어난 성능의 시리즈가 흥행을 이어갔고, 팬텀 Ⅳ는 영국 왕실과 국가 원수들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모델로, 1950~1956년 사이 단 18대만 생산됐다.
롤스로이스는 BMW 그룹에 인수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BMW그룹은 롤스로이스를 인수하면서 새로운 본사와 공장을 설립했고, 새로운 롤스로이스 팬텀을 개발하는 '프로젝트 롤스로이스'를 시작했다. 4년간의 연구 끝에 개발된 새로운 롤스로이스 팬텀은 롤스로이스 고유의 디자인과 21세기 첨단 기술의 결합으로 이뤄진 최고의 모델이다. 이후 고스트, 레이스, 던, 뉴 팬텀, 컬리넌, 스펙터(순수 전기차) 등을 통해 혁신적인 자동차를 지속해서 선보이고 있다.
◆바퀴, 문, 장식품... 존재하는 모든 것이 명품이 된다
롤스로이스의 상징은 보닛 위를 장식하고 있는 '환희의 여신상'이다. 일명 '플라잉 레이디'로 불리는 이 조각품은 우아한 여자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으로 롤스로이스 대주주의 연인을 모티브로 한다. 롤스로이스 대주주였던 몬터규의 연인 엘리노어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데, 한 조각가가 그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마치 하늘로 날아가는 듯한 정교한 모양의 여인을 조각품으로 만들어 차량에 부착했다. 이후 많은 롤스로이스의 오너들이 이런 특별한 엠블럼을 원하면서 브랜드의 상징이 됐다.
일반 자동차 도어의 개폐방식과는 반대로 열리는 코치도어 또한 롤스로이스의 특징 중 하나다. 코치도어는 오래전 마차의 문과 같이 뒤에서 앞으로 열리는 방식으로, 고객이 상반신을 숙이지 않고 단순히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해 고객의 우아한 승차를 돕고 있다. 또 도어의 손잡이가 먼 점을 감안해 C필러 안쪽에 도어스위치를 설치, 내부에서 스위치만으로 문을 닫을 수 있다.
롤스로이스의 또 다른 유명한 상징은 차량 도어에서 바로 꺼낼 수 있는 우산이다. 악천후 속에서도 롤스로이스를 타는 고객이 품위를 잃지 않고 승하차할 수 있도록 차량 도어에 장착했다. 이 우산은 테프론으로 코팅처리돼 건조하지 않고 그대로 말아 넣어도 녹이 슬거나, 변형되지 않는다.
회전하지 않는 휠 캡도 롤스로이스의 상징이다. 롤스로이스 바퀴 중앙에 위치한 RR 모양의 롤스로이스 엠블럼은 바퀴가 돌아가도 같이 돌지 않고 항상 그대로 있는다. 휠 캡 안의 베어링 장치로 로고를 고정시켜 주행 중에도 항상 제 위치를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그 이유는 로고의 정자세 유지를 통해 롤스로이스의 자존심과 품격을 유지하겠다는 상징적 의미가 내포됐다.
과거 롤스로이스는 고객의 출신과 신분, 재산, 사회적 위치, 영향력 등을 따져 소수의 선별된 고객들에게만 자동차를 판매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당대를 주름잡던 스타들 모두 롤스로이스를 갖고 싶어했지만 막상 판매를 거절해 스타들도 중고로 겨우 구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물론 지금은 비용만 지불하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차가 됐다. 그러나 롤스로이스는 여전히 비스포크 생산방식을 고집하며 장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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