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경기도 수원시 제10전투비행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날 대한민국 영공을 55년간 지켜온 F-4 팬텀 전투기는 다음 달 7일 퇴역식을 앞두고 49년 만의 고별 국토순례비행에 나섰다.
마치 영화 ‘탑건’의 한 장면처럼 총 8명의 조종사와 기자들은 일오횡대로 격납고로 향했다. 팬텀 고별 국토순례비행에 함께하기 위해 기자들은 조종복과 장구를 착용했다. 장구류 무게만 약 15kg을 착용하고 팬텀 후방석에 올라 마지막 비행을 체험했다.
비행에 나선 팬텀 4대에는 ‘필승편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필승편대라는 명칭은 1975년 방위성금으로 구매한 F-4D 5대에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직접 부여했다.
지상 발전기를 통해 예열하며 굉음을 내고 있는 4기의 팬텀. 4번기는 49년 전 방위성금헌납기의 모습을 재연해 정글무늬 도장을 새로 했다.
2기에는 회색 바탕에 ‘국민의 손길에서, 국민의 마음으로/ 1969~2024’라는 기념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문구 양옆에는 팬텀의 고유 캐릭터인 스푸크(도깨비) 문양이 새겨졌다.
왼쪽에는 빨간마후라와 태극무늬를 더한 스푸크가 자리했다. 오른쪽에는 조선시대 무관의 두정갑을 입은 스푸크가 위치했다.
활주로를 마주한 팬텀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헬멧과 귀마개를 뚫고 거친 엔진음이 파고들었다. 기체가 활주로를 박차고 떠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단 8초에 불과했다. 오전 10시 정각. 필승편대의 고별 국토순례비행의 막이 올랐다.
이륙 후 편대는 핑거팁 대형(손가락을 붙였을 때 검지부터 소지까지의 삼각형 모양)을 유지하면서 4번기만 좌우로 기동하며 상황에 따라 레프트 핑거팁, 라이트 핑거팁 대형을 만들었다.
필승편대는 평택 상공을 지나 천안으로 향했다. 이후 대한민국 공군의 핵심기지로 손꼽히는 충주기지와 청주기지 상공을 차례로 통과했다.
충청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넘은 필승편대는 팬텀이 주요작전을 펼쳤던 동해안을 따라 포항으로 향했다. 이어 포항과 울산 그리고 부산, 거제 등 대한민국 중공업과 무역업의 부흥을 이끈 주요 도시들을 지났다.
경기, 충청, 강원, 경상도를 숨가쁘게 비행한 필승편대는 재급유를 위해 ‘팬텀의 고향’ 대구기지에 착륙했다. 수원 기지 이륙 후 1시간 46분 만이었다.
대구기지는 1969년 팬텀(F-4D)이 미국·영국·이란에 이어 네 번째로 도입됐을 당시 최초의 팬텀 비행대대가 창설된 곳이다. 2005년 F-15K가 도입돼 팬텀의 공대지 타격 역할을 물려받기 전까지 팬텀의 주 기지 역할을 했다.
재급유를 마친 필승편대는 사천 상공으로 향했다. 대구기지를 떠나고 10분가량 흐르자 우리 공군력의 막내이자 기대주인 KF-21 2기가 합류했다.
팬텀과 F-15K, KF-21등 한국 전투기가 한자리에 모였다. 세 기종이 경남 합천에서 사천을 거쳐 전남 고흥까지 약 20분을 함께 날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심히 복귀하십시오”라는 KF-21 조종사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대선배 팬텀 편대에 막내가 보내는 헌사 같았다. KF-21은 우측으로 급선회하며 이탈했다.
남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비행하던 팬텀 편대는 국토 최서남단 가거도(소흑산도)를 향했다. 팬텀은 1971년 소흑산도에 출현한 간첩선을 격침하는 작전에서 활약했다.
가거도에서 서해를 따라 북상한 팬텀편대는 이날 새만금방조제를 지나 군산앞바다에서 수원기지를 향해 동쪽으로 마지막 급선회에 나섰다.
대구기지에서 이륙한 지 약 1시간 30분 만에 공군 수원기지에 착륙했다. 3시간여에 걸친 국토순례비행이 마무리됐다.
제10전투비행단 제153전투비행대대 박종헌 소령은 “49년 전, 국민들의 성금으로 날아오른 필승편대의 조국수호 의지는 불멸의 도깨비 팬텀이 퇴역한 후에도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라고 말했다.
공군은 오는 6월 7일 공군 수원기지에서 팬텀 퇴역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