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의 Indonesia Story] 인도네시아선, 가방끈 길면 이름도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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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입력 2024-05-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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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히 '고등교육 전성시대' 도래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문서에 쓰인 인도네시아 사람 이름을 보면 그 사람의 교육 배경을 알 수 있다. 이름 앞뒤로 개인의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부가하여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라면 보통 ‘교수, 박사, 이름, 학사, 석사’ 등 5가지 정보가 포함된다.

이름에 부가된 정보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인의 학위뿐 아니라 전공을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정부에서 전공 표기 방식을 표준화하여 정했기 때문이다. 처음 20~30개로 시작한 전공 표기 약자는 이후 전공 세분화 추이를 반영하여 100개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예를 들어 학부에서 인류학을 전공했다면 학사를 의미하는 S와 인류학을 의미하는 Ant가 합쳐져 S.Ant.라는 학위명을 쓴다. 산림학 분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면 석사를 의미하는 M과 산림학을 가리키는 Hut가 합쳐져 M.Hut.라는 학위명을 사용한다.

이름과 학위를 함께 적는 관행이 일반적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뿌리 깊게 일상에 파고들었는지를 최근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친구에게서 은행 통장 사본을 받았을 때였다. 통장에 쓰인 예금주를 보자. 이름 뒤에 그 친구의 석사와 박사 학위명이 첨가되어 있었다. 이는 통장을 개설할 때조차 예금주의 학력을 묻고 적어야 함을 의미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이 같이 쓰인 문서를 보면 학력 병기의 효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은 여러 학위가 추가되어 길게 표기되지만, 다른 사람은 이름만으로 짧게 소개하고 끝나버리는 상황은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이름을 통한 구별 짓기가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공식적 자리에서 개인을 소개할 때도 이름에 더해 학력을 덧붙이는 경우가 많으므로 학력은 개인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핵심 기제로 기능하게 된다.

이름에 학력을 병기하는 관행은 인도네시아 사람의 학력 선호를 반영한다. 대학 졸업자가 많지 않던 상황에서 높은 학력은 높은 사회적 지위로 전환되었고, 높은 사회적 평가를 뒷받침하는 자산으로 활용되었다. 인도네시아 농촌에서 조사할 때 나 역시 학력 선호의 이점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대졸자조차 많지 않은 상황에서, 박사 과정이라는 학력은 높은 가치재로 인정되었다. 공식적 성격의 모임에 초대받으면 학사와 석사 학위에 더해 박사 후보라는 공인되지 않는 학력과 함께 소개되었고, 상석에 자리하도록 요청되는 황송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 모두 학력 선호가 가져온 결과라 할 수 있었다.

고학력자에 대한 높은 평가가 당연시되는 환경에서 조사하면서 가졌던 의문 중 하나는 학력의 중요성과 달리 그것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강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뿐 아니라 자녀에게 학업을 독려하는 학부모를 주변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농촌이라는 조사지 배경을 고려하면 일견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녀를 대학에 보낼 경제적 능력을 갖춘 가정에서조차 자녀 교육에 크게 신경 쓰는 경우를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고학력을 좋아하지만 이를 얻고자 애쓰지 않는 모습은 자녀 교육에 올인하는 우리 현실과 대비되어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그에 대해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학 진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모습은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내가 만난 초·중·고교 학생은 방과 후 시간을 여유 있게 보내는 데 익숙했고, 자녀의 대학 진학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학부모를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2000년대 후반부터 변화의 흐름을 조금씩 감지할 수 있었다. 자녀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학부모를 접할 수 있었고, 대학 교육을 당연시하며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 역시 많아진 듯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경제적으로 본다면 2010년을 전후하여 인도네시아가 꾸준하게 5%대 성장을 이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급속한 소득 증가가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시기를 거치며 고학력에 대한 선호가 실천으로 이어진 양상은 통계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10년 10%에 불과하던 대학진학률은 2017년 20%, 2022년 30%로 수직 상승했다. 이는 대학생 수 증가를 초래해서 2010년 300만여 명이던 대학생은 2017년 690만명으로, 2022년에는 930만명으로 늘어났다.

고등교육 이수자가 급증했지만, 15세 이상 인구에서 대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2010년 6%에서 2022년 10%로 올랐을 뿐이다. 우리는 1985년 10%에 머물던 대졸자 비중이 2000년 24%, 2022년 53%로 꾸준히 증가했음을 고려해보면 인도네시아의 고등교육 확대는 아직 시작 단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학력자에게 높은 사회적 지위가 부여되고, 교육에 대한 투자가 점점 더 당연시되는 현재 상황을 고려해보면 고등교육의 팽창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되리라 예상된다.

대학 진학자 증가는 인도네시아 사회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 먼저 거론할 점은 고등교육 공급자인 대학과 관련된다. 교육 수요 확대는 고등교육기관 증가를 낳았다. 2012년 476개였던 종합대학은 2022년 785개로 증가했으며 단과대학, 전문대학 등을 포함한 전체 고등교육기관은 3100여 개에서 4500여 개로 늘어났다. 가히 고등교육의 전성기가 도래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러한 확장세에도 불구하고, 고등교육기관의 성장이 대학생 수 증가를 밑도는 추이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격차는 기존 고등교육기관의 거대화를 통해 채워지는 경향을 보였다. 내 경험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알고 지내던 사립대학 교수의 학교에서 2010년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방문한 캠퍼스에서 왜인지 활력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 교수는 원인 중 하나로 학생 수 감소를 들었다. 신입생이 1000명 이하로 줄어들면서 학교 운영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나 그 학교를 다시 방문했을 때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캠퍼스 곳곳에는 새로운 건물이 건축되고 있었고, 인근 부지에 새로운 캠퍼스를 추가로 조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급속한 학생 수 확대에 뒷받침되어서 한때 1000명에도 미치지 못하던 신입생은 10여 년 만에 7000~8000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대학 진학자와 졸업생 증가가 가져온 또 다른 변화는 고학력자의 성향을 갖춘 젊은 세대의 급격한 팽창이다. 대졸자와 대졸 이하 학력 보유자의 차이는 인터넷 이용률을 통해 예시될 수 있다. 최근 자료를 보면 대졸자의 인터넷 이용률은 85%에 이르렀지만 고졸자는 65%, 중졸자는 30%, 중졸 이하는 20%였다. 이 자료는 학력에 따라 삶의 지향과 목표, 행동에 있어 뚜렷한 차이가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학력에 따른 지향과 행동 차이는 ‘월드 밸류 서베이’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과 비교할 때 대졸자는 국내외 뉴스를 훨씬 많이 소비하고 유통했으며, 새로운 기술 변화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일과 관련해서도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대졸자에게서는 일하지 않으면 게을러진다거나 휴식보다 일이 더 중요하다는 노동관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대졸자의 행동과 가치관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고등교육의 팽창이 인도네시아 사회를 변화시킬 커다란 잠재력을 가진 요인임을 시사한다.

독립 직후 7000만명으로 세계 7위에 랭크됐던 인도네시아 인구는 1965년 1억명을 넘어서며 5위에 진입했고, 1980년에는 1억5000만명으로 4위로 올라섰다. 인구 증가세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1996년 2억명, 2012년 2억5000만명을 기록함으로써 인도네시아는 인도, 중국, 미국에 이어 4위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다.

세계 4위 인구 대국이라는 표현은 인도네시아를 묘사하는 핵심 키워드로 자리매김했지만, 그것이 항상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던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이전까지 2억명이라는 인구는 인도네시아가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짐으로 여겨졌고, 산아제한 정책을 통해 인구 증가세를 막아보려는 노력이 진행되기도 했다. 연간 인구 증가율이 1%대 미만으로 감소한 2010년대 중반 이후 인구 통제의 시급성은 완화되었지만 인구 증가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우려는 과도한 인구 규모로 인해 모든 국민이 양질의 삶을 누릴 환경을 만들기 어렵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설정한 빈곤선 아래에 놓인 인구 규모가 최근까지도 전체 인구의 10%에 이르고 있음은 인구 증가에 대한 두려움이 쉽게 사라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등교육의 급속한 확대는 2억8000만명에 이르는 인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의 증가는 이들의 개방적이고 도전적이며 세계화된 가치관과 행동이 사회의 여러 영역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등교육의 확대는 4위의 인구 대국이라는 말에 부여되었던 자조적 평가를 넘어서서, 그것을 인도네시아의 강점으로 바꿀 잠재력을 내포한다. 현재 10%에 머무는 대졸자 비율이 두 배로 늘어날 때, 이는 단순 수치상의 증가가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변화의 힘으로 작용할 것이며, 인도네시아를 인구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차원의 강국으로 전환시킬 원동력이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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