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불확실한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시그널은 여전히 한은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시점이 갈수록 지연되는 가운데 긴축 대오에 합류했던 주요국 중앙은행은 각자도생에 나섰다. 그러나 한은은 1400원대를 위협하며 요동치는 환율과 자본 유출을 고려하면 역대급으로 벌어진 미국과 금리 격차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4일 통계청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가 1년 전보다 2.7% 올랐다고 발표했다. 이날 김웅 한은 부총재보는 이날 물가 상황 점검 회의를 열어 "소비자물가와 근원물가 상승률이 모두 전월보다 낮아지면서 둔화 흐름을 이어갔다"고 평가했다.
김 부총재보는 "석유류·가공식품가격의 오름폭이 확대됐으나 근원상품과 농축수산물 가격 상승률이 둔화된 데다 지난해 전기·도시가스요금 인상에 따른 기저효과도 작용했다"면서 "생활물가 상승률은 농축수산물가격 둔화 등으로 3%대 초반으로 하락했다"고 설명했다.
김 부총재보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존한 가운데 국내외 경기흐름, 기상 여건 등과 관련한 불확실성이 여전히 큰 만큼 물가가 예상대로 목표에 수렴해 가는지를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가 상승률이 이대로 둔화세를 유지한다면 한은은 올 하반기 금리 인하 카드를 꺼내 들 수 있다. 지난달 23일 기준금리를 3.5%로 11번째 동결하면서 이창용 한은 총재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3~2.4%로 내려가는 트렌드가 잘 확인되면 금리 인하를 고려할 수 있다"고 단서를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5.25~5.50%)과 역대 최대 금리 격차(2.0%포인트)는 여전한 장애물이다. 연준(Fed)이 '울퉁불퉁한(bumpy)' 물가를 걱정하며 인하를 서두르지 않는데 한은이 외국인 자금 유출, 환율 불안 등을 감수하고 굳이 먼저 금리를 낮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난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4%로 연준의 목표치(2%)를 아직 크게 웃돌고 있다. 게다가 연준은 미국 경제 전반에 대해 여전히 확장 국면에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연준은 지난달 29일 발표한 5월 경기 동향 보고서(베이지북)에서 "미국 내 12개 연방준비은행(연은) 담당 지역 중 뉴욕, 필라델피아, 클리블랜드 등 10곳은 소폭(slight) 내지 다소 완만(modest)한 성장세가 이어졌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시장에선 기대했던 9월 금리 인하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은은 '천천히 서두르는'(Festina Lente) 균형적인 통화정책을 펼치겠다는 입장이다. 최근 박영환 통화정책국 정책총괄팀장과 성현구 과장은 '향후 통화정책 운용의 주요 리스크' 보고서에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통화정책 기조 전환을 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슨 일이든 너무 서두르면(festina)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고, 너무 기다리면(lente) 타이밍을 놓쳐 효과가 약화될 수 있다는 의미다.
빠른 정책기조 전환에 따른 리스크로는 물가의 목표수렴 지연, 환율의 변동성 확대, 가계부채 증가세 확대 등을 꼽았다. 특히 환율 변동성이 커지면 물가 상승률 둔화 속도가 느려지고, 자본 유출입으로 금융 안정에도 영향을 준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책기조를 너무 늦게 전환할 경우 수출·내수 간 차별화 심화, 금융시장 불안 리스크 증대 등이 우려된다고 한은은 설명했다.
박 팀장은 "전성기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천천히 서둘러라'는 국내외 중앙은행이 앞으로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라며 "하반기 이후 통화정책은 양 측면의 리스크를 종합적으로 점검하면서 결정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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