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문의 역사의 교차로에서] 교활한 권력 앞에서 작아지는 '민초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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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입력 2024-06-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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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서지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다이어트나 성인병에 관한 유튜브를 보면 거의 빠짐없이 듣는 말이, 인류는 끼니마다 먹을 것을 조달하기 어려웠던 수렵채집시대를 통해서 다음번 식사시간에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에 대비해서 당분을 지방으로 변환해서 세포 사이에 저장하니까, 당분 섭취는 비만과 당뇨 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세계의 반 이상 지역에서 식량부족은 해결된 지 오래고 오히려 과잉이 문제인데 DNA가 그 상황변화를 감지하고 그에 맞게 진화하기까지 얼마나 걸려야 할까?

그런데 생물학적 DNA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적, 의식적 DNA 역시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서 DNA를 신속히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고 손을 사용하고 도구를 이용하고 언어를 발명해서 ‘상상계’를 창조해서 자연과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게 되었고 참으로 아마 하나님이 보아도 놀라고 찬탄할 만한 문명을 이룩했다. 애초의 조직사회에서 민초들은 권력자의 횡포와 수탈에 항거하지 못했지만 차차 무력자들이 연대해서 권력자에게 저항하고 권리를 쟁취해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숭고한 영웅들이 자신을 희생해서 민중의 어깨에서 폭정의 굴레를 벗겨주어서 이제 가장 힘없는 민초들도 민주시민으로 인권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민초들의 DNA에는 아직도 권력자에 대한 공포가 본능적 기제인 듯하다.

아직까지 힘없는 백성들의 DNA에는 권력자에게는 굴종이 살 길이고 저항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고 파멸할 수도 있다는 인식이 너무나 뚜렷이 각인되어있어서 권력자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게 만들 뿐 아니라 애초에 ‘알아서 기도록’ 만드는 것 같다. 물론, 권력자의 요구들 거절했을 때 맞닥뜨릴 수 있는 불이익, 피해를 계산해서이기도 하지만 권력에 대해서는 본능적 반응이 굴종인 사람이 아직 허다한 것 같다.
바로 며칠 전, 민초들의 권력자에 대한 공포심의 실체를 다시 한번 통감하게 되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전 성남시장 김병량씨의 수행비서였던 김모씨에게 전화를 걸어서, 자기가 변호사 시절에, 친하던 KBS 피디에게, 당시 언론과의 접촉을 회피하던 김병량 성남시장과 통화를 해보려면 당시 수원지검의 모 검사라고 사칭해 보라고 ‘코치’한 일을 자기가 한 일이 아닌 것으로 재판에서 증언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한 2018년 12월의 통화내용의 녹음이 공개된 것이다.

전화의 수신인 김모씨는 오래 전, 자기가 수행하는 보스의 사무실에서 받은 전화 내용(검사 사칭)에 대해서 증언함으로써 유죄판결을 받았던 그 사람이 유력 도지사 후보가 되었으니 그가 도지사로 당선되면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해악)이 돌아올지 몰라서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좌불안석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당사자인 이재명 경기지사 후보에게서 전화가 왔으니 한편 나의 마지막 날이 왔구나, 싶기도 하고 한편 이 사람 말을 잘 들으면 내가 이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겠는가? 녹음된 통화내용을 들으면 이재명이 협박조로 나오지 않고 ‘도움을 받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니까 김모씨가 최대한 ‘협조적’ 자세로 대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주당에서는 ‘위증을 해달라’고 ‘위증’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으니 위증을 요구하는 전화는 아니었고 한두 번 ‘사실대로 말해달라, 사실을 기억해 달라’는 말을 했으니 진실된 진술을 촉구하는 전화였다고 주장한다. 그 김모씨가 사실대로 증언을 하면 자기는 도지사 후보 자격을 박탈당하고 정계를 은퇴하고 변호사 자격도 박탈당할지 모르는데 어느 누가 그렇게 자기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언을 해달라고 일부러 전화를 걸었겠는가? 더구나 이재명이? 그 전화 내용을 들으면 이재명이 용의주도하게 어눌한 듯한 말투로 상대방을 안심시키고 명백히 위증을 지시하지는 않으면서 진실에 대한 혼돈을 유도하는 기법이 놀랍다.

이재명은 자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던 김씨의 과거 증언에 대해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 없이, 동시에 살려달라고 읍소도 하지 않고, 다만 그 PD의 검사사칭 전화가 있었던 때로부터 여러 해가 지났고 김모씨가 모시던 전 성남시장 김병량이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그가 상황을 조금 다르게 기억한다고 해서 누구에게 해가 되거나 누구를 배반하는 게 아님을 지적하고, 김모씨가 기억하는 사실을 이재명의 ‘사실’로 대체하는 작업을 편 것으로 보인다. 

전화의 수신인으로 이재명이 결코 자기에게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제안을 하기 위해 전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 김모씨는 처음부터 얼어서 제대로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 통화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위증을 요청하러 전화를 했지만 ‘내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 위증을 좀 해달라’고 요청할 이재명은 아니다. 물론, 자기의 필요가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에 이재명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수신인에게 던진 그물망을 좁혀 들어간다. 이재명을 구해주려다가 자신도 위법자가 될 수 있는, 아니 이재명을 구해주려면 자신이 범법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김모씨는 더욱 더 심한 모호화법을 구사한다. ‘기억도 사실, 크게 저기한 기억도 잘 안납니다’라고 김모씨는 자기 뇌리의 기억은 심히 바랬으니 이재명이 ‘점지해 주는’ ‘사실’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있음을 알린다. 이재명 또한 자신을 절박한 대명사의 장막 뒤에 감추고 (김병량 시장과 KBS 사이에 자신(이재명)을 주범으로 하기로) ‘정치적인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등으로 자신의 기억도 100% 확실하지는 않음을 시사하며 모호성을 확장해 나간다. 나아가, 김모씨는 결코 그, 이재명과 KBS와 한 편이 아닌데 그를 은근슬쩍 자기 편에 품는 듯한 화법을 쓰기도 한다: ‘우리 시장님 모시고 있던 입장에서 우리 주장이었으니까 . . . ’(이재명은 김병량시장을 김모씨와 같이 모시고 있었던 적이 없다) 그 어눌한, 약간 더듬거리는 듯한 어조로 김모씨를 안심시키면서 문제의 ‘사실’이 비석에 새겨놓은 비문처럼 만고불변의 객관물이 아니고 양쪽이 인간적인 공감대를 통해서 수정하고 새로이 창출할 수도 있는 사안임을 시사한다.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정확한 사실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 때가 되었고 그 대신 사실보다 나은, 사실이었어야하는 합성품이 사실을 대체할 수 있다는 암시를 강하게 하면서 그 새로운 사실은 변론요지서에 담겨있다고 인식시키고, 김모씨는 ‘(변론요지서가) 방향을 잡아주면 거기에 맞춰서 더 지켜드리겠습니다’라고 이재명에게 완전패배를 선언한다.

이 통화를 들으면서 몇해 전에 주목을 끌었던 ‘위력에 의한 성폭행’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우리 송사리 민초들이 대어(大魚) 앞에서 보호색을 퍼올리며 엎드리고 죽은 시늉을 하는 모습이다. 그 통화는 명백히 김모씨가 녹음한 것인데 자신이 이재명의 교사에 따라 위증을 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될 그 녹음을 삭제하지 않고 보존했다는 것은 김모씨가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고단해질 수 있는지,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단순한 한마디 위증일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포기요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부정하는 그 사건을 언젠가는 밝히고 싶은, 밝혀졌으면 하는, 한 가닥 희망으로 그 녹음을 사수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민주주의가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나라에서는 권력자도 대중의 아이돌—애완견—이다. 민중은 권력자를 쓰다듬고 예뻐할 수도 있고 실증이 나면 마구 때려서 내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인격의 존엄성을 지키려면 그야말로 사수(死守)를 해야하는 민초가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을 인식해야 하겠다.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영문학과 학사 ▷미국 웨스트조지아대학 영문학 석사 ▷뉴욕 주립대학 영문학 박사 ▷1974년 이래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 ▷현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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