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한민국 공동체는 어떻게 국민적 단합을 이루고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유지해나갈 것인가? 역사문화교육을 통해 국민 개개인을 각성시키며, 기업을 발전시키고, 나라를 강하게 만들자는 차원에서 필자는 우리 문화의 원형을 복원하고 거기서 긍정적 DNA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한류가 대표적인 문화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한류를 통해 마을과 지역, 국가, 그리고 기업과 사회단체 등 여러 단계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성장과 발전의 동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대진대학교 서병국 전 교수의 「고구려인의 공동체의식 연구(2004)」를 통해 예지를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병국 교수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인은 음주가무를 즐기는 동이족의 전통을 이어받아 낮에는 성을 쌓거나 생산 활동을 하며 밤에는 음주가무를 하며 동료들과의 단합을 도모했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식을 다지고, 고구려를 강하게 만들어 중국 등 주변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고도의 문화예술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노래와 춤, 악기 등은 중국에 전파돼 500여 년 동안 고려악, 고려무, 고려기 등으로 사랑을 받았다. 이 같은 고려풍은 오늘날 ‘한류의 연원’으로 확실하게 문헌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고구려가 중국과 필적할 만한 문화를 향수했기에 고구려풍의 한류가 중국인을 매료시킬 수 있었다.
『구당서』권29 음악지2를 보면 고구려와 백제 음악이 남조인 송나라(420-478)에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주는 가사가 있다. 이보다 늦은 6세기 말에 고구려는 북주(北周)가 북제(北齊)를 멸망시킨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고구려 음악을 북주에 선사한 바가 있다. 북주의 시인 왕포(王褒)는 ‘고구려곡(高句麗曲)’이라는 시를 지어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기울인 잔에서 술이 줄줄 흐르고 늘어뜨린 팔소매 하느적거리는구나!(傾杯覆碗凗凗 垂手奮袖婆娑)”
고구려음악에 이어 고구려춤도 중국에서 널리 퍼져 사랑을 받았다. 『구당서』와 『통전』은 고구려 춤꾼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춤꾼 네 사람은 뒤로 상추를 틀었으며, 이마를 다홍색으로 바르고 금귀고리를 했다. 소매가 아주 길어 춤을 출 때 너울너울 날렸다.”고 한다. 당나라의 시선 이백은 고구려춤을 역동적으로 묘사했다. “깃털 모양 금장식 절풍모를 쓰고, 하얀 신 신고 망설이고 머뭇거리다, 재빨리 넓은 소매 저으며 훨훨 춤을 추니, 마치 요동에서 날아온 매처럼 나래를 펼치는 듯.” 고구려의 노래와 춤은 화려하다. 춤동작은 경쾌하고 강렬해 예술성이 매우 풍부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백은 701년에 태어났으니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고려풍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춤은 오늘날 BTS춤처럼 역동적이지 않았을까?
여기서 고구려 악대를 구성하는 악기를 보면 『수서』에 14종, 『통전』에 17종, 『신당서』에 20종이다. 고구려에서 노래를 연주하는데 사용한 악기는 대부분 중국 또는 서역의 그것과 같다. 『수서』에 수록된 고구려 악기는 탄쟁(彈筝), 와공후(臥箜篌), 수공후(豎箜篌), 비파(琵琶), 오현(五絃), 적(笛), 생(笙), 소(簫), 소필률(小篳篥), 도피필률(桃皮篳篥), 요고(腰鼓), 제고(齊鼓), 담고(擔鼓), 패(貝) 등 14 종이다. 『통전』에 수록된 고구려 악기는 탄쟁, 추쟁, 와공후, 수공후, 비파, 오현, 의취적, 생, 횡적, 소, 소필률, 대필률, 도피필률, 요소, 제고, 담고, 패 등 17 종이다. 생황은 공통적으로 포함되고. 추쟁, 대필률이 『통전』에 추가로 포함됐다. 적은 의취적, 횡적으로 나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유물을 통해 고구려와 중국의 예술교류를 살펴보면,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는 주변 국가들을 초청해 국제음악제를 개최하며 문화예술 교류의 기회를 가졌다. 중국 산시성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채기타재악용(三彩騎駝載樂俑)이 이를 설명하는 것 같다. 삼채기타재악용은 녹색·남색·갈색의 세 가지 색을 넣은 당삼채 일종으로 낙타를 타고 생황, 월금, 적을 연주하는 사람을 형상화했다. 1959년 서안시 서교중보촌(西郊中堡村)에서 출토된 당삼채는 목을 길게 뽑고 우는 낙타등 위의 선반에 오색찬란한 양탄자를 깔고 연주하는 모습이 역동적이다. 이 유물 등을 통해 고구려 악공이 생황 등을 연주하는 장면을 짐작할 수 있다.
‘생황’ 등 고대악기들은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다방리 비암사에서 출토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비석 모양으로 조성한 불상에 ‘생황’ 등의 주악상이 새겨져 있다. 연대가 가장 오래된 주악 석상으로 추정되며 국보 제106호로 지정돼 있다. 따라서 이 비상은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 문무왕대인 673년 백제 유민의 유력자인 전 씨가 발원해 이룩한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 성덕왕 24년(725년)에 만들어진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에 새겨져 있는, 선녀가 하늘을 날며 생황을 연주하는 비천무늬 상으로 볼 때 생황 등 고대악기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려사』에도 고려 예종 9년(1114년)과 예종 11년(1116년)에 연향악과 제례악 연주에 쓰기 위해 생황 등을 북송에서 들여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국보 제10호 백장암 삼층석탑에서, 내소사 대웅전 천정의 악기벽화에서도 생황 등을 발견할 수 있다. 해인사 명부전 주악비천상은 1873년에 다시 지어졌다. 고구려의 전통이 1200년을 넘어 해인사 승려 장인의 손끝에서 재현되었다. 각각 생(笙), 비파(琵琶), 소(簫), 적(笛), 금(琴) 등 악기의 모습이 보인다. 신라, 고려, 조선의 세종에 이르러 우리 소리(훈민정음)와 우리 악기(내소사 악기 벽화) 및 해인사의 악기 단청 벽화 등을 통해 고구려 악기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예와 악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율려(律呂)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고 음악으로 백성의 마음을 감화시켜 도의를 실천하자는 뜻이다. 우리는 고구려풍에서 비롯되는 한류의 전통을 음악과 춤, 악기 등 여러 면에서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전통문화의 산업화가 크게 기대되는 바이다.
이춘구 필자 주요 약력
△전 KBS 보도본부 기자△국민연금공단 감사△전 한국감사협회 부회장△전 한러대화(KRD) 언론사회분과위원회 위원△전 전라북도국제교류센터 전문 자문위원△전 한국공공기관감사협회 부회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