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일본, 싱가포르, 캐나다 등이 정부 차원에서 AI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예고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국가들도 정부가 직접 나서 AI 강화를 위한 장기 계획을 세우고, '오일 머니'를 앞세운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 역시 정부 주도로 AI 분야에서 세계 3위에 들겠다는 'AI G3' 슬로건을 내세우며 다양한 지원 정책을 발표하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 훨씬 커질 AI 시장에서 조금이나마 입지를 넓히기 위한 국가 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모양새다.
AI 기업 직접 지원 나선 日···싱가포르·캐나다도 조 단위 투입
일본은 AI 육성을 위해 올해에만 1180억엔(약 1조276억원)을 투입한다. 세부적으로 △AI 활용 촉진 601억2000만엔 △AI 개발 강화 568억4000만엔 △리스크 대응 10억6000만엔 등으로 예산을 배정했다. 2016년 '소사이어티 5.0'을 시작으로 꾸준히 AI 관련 전략을 발표해 온 일본은 올해 들어 독자적인 생성 AI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초거대언어모델(LLM)과 슈퍼컴퓨터 정비 등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AI 정책 중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정부가 AI 기업에 직접 자금 지원을 한다는 점이다. 지난 5월 소프트뱅크의 AI 개발을 위한 슈퍼컴퓨터 정비에 최대 421억엔(약 3700억원)을 보태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일본 대표 통신사 중 한 곳인 KDDI(102억엔)를 비롯해 사쿠라인터넷(501억엔), 하이레조(77억엔), 루틸리아(25억엔), GMO인터넷그룹(19억엔) 등 AI 슈퍼컴퓨터 개발에도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싱가포르는 우선 그래픽처리장치(GPU)와 AI 칩 하드웨어 인프라 투자에 심혈을 기울인다. 여기에 들이는 비용만 전체 예산 중 절반 수준인 5000억원에 달한다. 외신에 따르면 이미 싱가포르는 국립 슈퍼컴퓨팅 센터를 엔비디아의 최신 GPU로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며, 싱가포르 국영 통신사인 싱텔은 엔비디아와 손잡고 동남아시아 데이터센터 확장 추진에 나섰다. 싱가포르 정부는 앞으로 엔비디아를 비롯해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 업체 등 다양한 빅테크 기업들과 파트너십 강화에 나설 전망이다.
AI 인재 양성에도 집중한다. 싱가포르 정부는 AI 학사와 석·박사 과정 장학금 지원과 프로그램 확대, 해외 인턴십 교육 강화 등에 3년간 약 2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또 세계 최고 수준의 AI 석학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AI 객원교수직을 신설하고, 5년 내 AI 수요 지원을 위한 실무자 풀을 현재보다 3배 많은 1만5000명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생성 AI 솔루션을 자체 개발·구현하는 데 나서는 우수 기업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보조금을 지원한다.
캐나다의 AI 정책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기업 간 AI 컴퓨팅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구성된 'AI 컴퓨트 액세스 펀드'가 꼽힌다. 캐나다 정부는 그간 해외에 집중돼 있던 컴퓨팅 인프라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국내 데이터센터 건립과 AI 슈퍼컴퓨터 개발 등에 나설 계획이다. 이렇게 구축된 인프라를 AI 연구소, AI 관련 기업 등이 보다 용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캐나다 정부는 이러한 인프라 구축으로 자국 AI 생태계 확산은 물론 더 많은 글로벌 AI 투자가 캐나다로 향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탈리아·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 행보에도 관심이 집중된다. 이탈리아는 조르자 멜로니 총리가 지난 3월 AI 프로젝트 촉진을 위한 10억 유로(약 1조4000억원) 규모로 투자 펀드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향후 민간 부문에서 추가로 20억 유로(약 2조8000억원)를 유치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프랑스는 지난해 AI 클러스터 구축에 2030년까지 5억 유로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가운데 올해 초 범부처AI위원회가 보고서를 통해 "앞으로 5년간 매년 50억 유로(약 7조원)를 투자하라"고 제언하기도 했다.
중동, AI '다크호스' 등극할까···'오일 머니' 앞세워 투자 박차
상대적으로 AI 분야에서 후발 주자로 꼽히는 중동 역시 막대한 금액을 자국 AI 육성에 쏟아붓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UAE 등은 최근 정보기술(IT) 분야를 미래 산업으로 점찍고 막대한 투자에 나서고 있는데, AI도 중점적인 투자 대상으로 떠올랐다.
사우디 정부는 국부펀드인 사우디공공투자기금(PIF)을 통해 400억 달러(약 53조원) 규모로 AI 펀드를 설립하는 계획에 대해 논의 중이다. 펀드 조성이 확정되면 AI 관련 투자 규모로만 보면 역대 최대 수준이다. 사우디 정부는 이를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 대표 벤처캐피털(VC) 중 한 곳인 앤드리슨 호로비츠 등 다양한 금융사들을 만나 펀드 조성 관련 파트너십 구축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펀드는 올해 하반기 본격적으로 운용될 것으로 예상되며 AI반도체, AI 컴퓨팅 인프라 구축, AI 기술 스타트업 지원 등 다양한 방면에 자금이 투입될 예정이다.
UAE 정부 역시 2017년 발표한 'UAE 국가 AI전략 2031'을 축으로 자국의 AI 청사진을 그리는 데 몰두하고 있다. 올해 들어서도 아부다비에 AI 등에 대한 연구와 투자 정책을 만드는 'AI·첨단기술위원회(AIATC)'를 창설했고 2월에는 정부 차원에서 오픈소스 LLM '팔콘' 기술 고도화를 추진하는 '팔콘 재단'을 설립했다. 3월에는 AI 기술투자 회사인 'MGX'도 세웠다. 두바이 역시 4월 두바이 'AI 범용 계획'을 발표했으며 5월에는 AI 기술 스타트업을 위한 전용 공동 작업 공간인 '두바이 AI 캠퍼스 클러스터'를 두바이 국제금융센터(DIFC)에 설립했다. 최근에는 국영 AI 기업인 G42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15억 달러를 투자받기도 했다.
중동 국가들의 막대한 투자가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양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 중동이 AI로 인한 전 세계 총 이익 중 2%인 3200억 달러를 차지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사우디아라비아는 1352억 달러, UAE는 960억 달러의 이익이 AI로 인해 창출될 전망이며 이는 각국 국내총생산(GDP)에서 각각 12.4%, 13.6%를 차지할 것으로 집계됐다.
'소버린 AI' 구축 경쟁···정부 지원 절실
주요 국가들의 이러한 AI 투자 행보는 점차 'AI 국가주의' 경향을 뚜렷하게 나타낸다는 평가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월 AI 산업 주도권을 두고 펼치는 각국 간 경쟁을 이같이 표현한 바 있다. 이에 개별 국가마다 AI 추론·학습 등을 위한 대규모 인프라 구축, AI 언어모델이나 서비스 등을 개발할 유망 기업들에 대한 지원, 고급 AI 인재 유치·육성 등과 관련한 다양한 전략을 펼치고 있다.
특히 각 국가들이 저마다 자체 언어모델·인프라 구축에 나서면서 자체 인프라와 데이터를 활용한 독립적인 AI를 의미하는 '소버린(Sovereign) AI'에 대한 관심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국가적인 AI 경쟁력 확보가 화두로 떠오른 만큼 정부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는 분석이다. AI 분야 교수는 "기본적으로 초거대 AI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그야말로 '조 단위' 쟁탈전이라고 할 수 있다"며 "한국 정부 역시 국가 명운이 걸렸다고 생각하고, 보다 적극적인 지원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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