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며칠간 가족 친지들과 함께 북해도 여행을 했다. 한국 사람들에게 북해도 여행은 부모님을 모시는 최고의 효행상품이라는 말도 있지만 실은 우리 가족 중에 북해도와 얽힌 이야기가 있어 언젠가 꼭 가봐야 한다는 말도 있고 해서 3대가 함께하는 14명의 가족을 이끌고 다녀왔다.
북해도의 면적은 남한 면적의 80%에 해당할 만큼 넓다. 그리고 일본의 영토가 된 것이 명치유신 이후라서 어찌보면 신생 개척지 같은 곳이다. 물론 아이누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이 말살되는 비운의 역사가 깃든 땅이기도 하다. 초기 북해도 개척에는 미국의 영향이 크다. 개척 시기 삿포로 도시계획이나 농업기술을 가르친 것이 미국인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삿포로 농학교 (현 홋카이도 대학) 초대 교감이었던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박사다. 그가 북해도에 머문 기간은 단 6개월이 채 안 되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아주 영향력이 컸다. 그에게 직접 지도를 받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가 된 우치무라 간조도 클라크가 세운 삿포로 농학교 출신이다. 클라크 박사가 학교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배웅을 나온 학생들에게 마지막 남긴 말이 그 유명한 'Boys be ambitious!'다.
과거 북해도는 일본의 식량기지로서 그리고 자원 채굴의 기지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지금은 탄광이 모두 폐쇄되었지만 한때는 북해도 탄전이 꽤 유명했다. 2차 대전 말기 미국의 남양군도 봉쇄로 석유 수급이 원할하지 못하자 일본은 석유 대체품으로 석탄 생산에 열을 올렸다. 이 석탄 채굴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 그 가운데에도 북해도와 규슈 탄전이 유명했다. 일제의 징용이 본격화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징용된 조선인 72만여 명 중 14만5000여 명이 홋카이도로 끌려와 유바리를 비롯한 탄광, 항만, 비행장, 댐 건설 노역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중 상당수가 사망해 광복된 뒤에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이름 없는 혼으로 떠돌고 있는 이가 많이 있는데 그중에 한 명이 우리 할아버지다.
사실 우리 할아버지는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것은 아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자진해서 일본행을 택했지만 당시에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결국 광부나 벌목공, 철도 건설 등 험한 일뿐이었다.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그의 아들 가즈오(一男)에 대한 이야기다. 가즈오는 나의 아저씨 이름이다. 가즈오는 일남의 일본식 표기다. 아니, 일남은 일본 이름 가즈오의 한국식 표현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북해도로 추정하고 있다. 북해도가 아니라 가라후토(사할린)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83세인 가즈오씨는 본인도 확실하게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지 못해 곤혹스러워 한다. 어쨌거나 가즈오씨 가족은 그가 북해도나 가라후토 어딘가에서 살았고, 거기서 태어나 세 살 때 엄마와 6개월 된 동생과 함께 광복되던 해, 정확히는 1945년 광복되기 2개월 전에 한국으로 왔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 전쟁 막바지에 총동원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젊은 남성들은 전선에 마구 투입되던 시기였고 그 가족은 전선에서 좀 더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키던 때였다.
가즈오씨는 나의 5촌 당숙으로 아저씨라 부르지만 여기선 가즈오라 칭한다. 우리 할아버지는 두 형제로 가즈오씨의 아버지는 내게 둘째 할아버지다. 두 형제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는 바람에 친척집에 얹혀 살았다. 형은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는 조건으로 땅을 받아 고향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고 둘째는 시골에서 살 수가 없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할아버지 형제를 키워주시던 친척도 당시 생활이 어려워 몇 년 후 만주로 이주했다.
일본에 간 작은 할아버지는 식민지 조선에서 온 청년으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이것저것 일을 찾아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다가 북해도까지 갔다. 북해도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돈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가라후토(사할린) 벌목공으로 가게 되었다. 혼자보다는 가족을 더 우대해준다는 말을 듣고 일시 귀국해 시골에서 급하게 결혼을 했다.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겠다고 땅도 조금 사 놓았다. 그리고 바로 이 신혼부부는 일본 북해도를 거쳐 가라후토에 가서 신접을 차렸고 거기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남자가 되라는 의미로 일남(一男)이라 했고 3년 후 난 둘째는 언젠가 올 광복의 날을 그리며 광남(光男)이라 붙였다.
가라후토가 일본 땅이 된 것은 최근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에 전비청구를 하지 않는 대신 사할린을 할양받았다. 그렇게 해서 사할린 남부가 일본 땅이 되었고 탄광과 벌목이 주요 산업이 되었다.
북해도 북부에 펼쳐진 대지, 사할린. 일본명으론 가라후토(樺太)로 불렸다. 1945년 당시 40만명 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둘째가 태어나고 전황은 일본에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하와이를 기습공격하여 일본이 연전연승한다고 뉴스에선 말하지만 현실은 식량도 배급으로 바뀌고 생활용품도 공출이라고 해서 구입하는 것보다 오히려 빼앗기는 것이 더 많았다. 들려오는 소문에는 소련이 참전하여 어느 날인가 가라후토로 들이닥친다는 소식까지 전해져 흉흉한 분위기였다.
1945년 6월이 되자 모든 남자는 남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보다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킨다고 했다. 일본 내지로 갈 것인지, 조선으로 돌아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지만 세 살 난 아들과 6개월 된 간난아기를 업고 부산항에 내렸다. 부산에서 두촌까지는 몇 달을 걸어 빌어먹으면서 고향에 돌아왔다.
가라후토에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전 선언이 있고 나서도 10일간이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그래서 주민들의 희생이 컸다. 지금도 정확한 숫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5000~6000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최전선에 투입된 소년병들, 지옥의 피란 행렬에서 죽어간 아이들과 어머니들. 소련군들이 상륙하자 많은 가족과 여성들은 자결을 택했다고 한다.
가즈오의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넋두리 같이 말씀하신 내용은 “그때 007가방을 내가 가져왔어야 했어. 일본 가서 번 돈을 거기에 넣어 놨는데, 그 난리통에 가져올 수 없어 그 양반이 가져오기로 했는데 못 왔잖아···. 그 돈이 있었으면···” 어머니는 모든 불행과 가난의 원인을 그 가방에 묻었다. 남편 없이 농사일 하며 애들을 키워내느라 한 평생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다. 고단한 삶을 산 어머니에게 남은 것은 그 007가방으로 상징되는 그 회한뿐이었다.
가즈오가 부르는 노래, 내 나라 내 고향
인천을 떠나 2시간 30분이면 닿는 북해도는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한 늦봄, 어디 가나 꽃으로 가득했다. 기대 반 설렘 반 그리고 미안함도 함께 가지고 왔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날까 해서 북해도로 날아왔다. 북해도 대지와 넓은 하늘 그리고 북양의 바다를 바라보면 혹시 바람이 전해주는 음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귀를 기울여 본다.
희미하지만 북해도 넘어 가라후토에서 일하셨다고 들었지만 기억에도 없는 곳이라 가라후토 가까운 북해도 어딘가에 아버지의 흔적을 느낄까 해서 찾아왔다.
아버지라 불러 본 기억이 없지만 분명 내 아버지는 이 땅 어딘가에 몸을 눕히셨을 거라 생각하면서 80년이 지났지만 용기 내어 이제 찾아왔다.
처음 밟아보는 땅이지만, 처음 만나보는 사람들이지만 내가 세 살까지 이곳에 살았다고 하니 낯설지는 않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도 그런대로 괜찮다. 소주만 있으면 뭐든 괜찮지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 돌아가신 이 땅에 마침내 내가 왔구나. 아니, 내 태어나 자란 곳에 이제야 돌아왔구나. 드넓은 대지를 바라보며 긴 호흡을 해본다. 먼 산에는 아직 눈이 남아 있네.
80년 만에 귀향, 고향에 대한 아무 기억도 생각도 추억도 없지만 내가 태어나고 잠시나마 이곳에서 자랐다고 생각하니 왠지 고향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도 저 하늘 아래 이 공기를 마셨을 거라 생각하니 여기는 낯선 이역 땅이 아니라 아버지와 내가 연결된 곳이다.
일본에선 남자라면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는데, 내 이름 가즈오(一男) 가 바로 그런 뜻이란 걸 여기 와서 알았다. 아버지는 그런 야망을 가진 분이었을 것이다.
유바리 석탄기념관으로 가는 길은 내 시골길과 비슷했다. 석탄박물관에 검은 얼굴로 웃고 있는 사진을 보니 내 아버지인 줄 착각했다. 석탄갱도를 재현해 놓은 지하에 들어가보니 내 아버지 석탄 캐며 저렇게 고생하셨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탄광을 나와 일본 최고라는 유바리 멜론을 먹어보았다. 달콤하면서 부드럽게 살살 녹는 이 맛을 우리 아버지는 맛보았을까 생각하니 약간 짭짤한 맛이 느껴졌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슬픈 시대가 있었음을 나는 잊지 않고 있지만, 어머니와 어린 시절의 가난을 생각하면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 하지만 외면하기보다는 역사를 직시하며 극복하는 것이 나의 후손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북해도 여행 끝에 내 집에 와서 우리 가족을 다시 보니 우리 가족이 내 나라며 우리 세계였구나. 며느리 중에는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도 있고 미국인 사위도 있네.
한 세대 더 지나면 완전 글로벌 패밀리가 되어 한~가족으로 살겠지. 이것이 우리 조상들이 꿈꾸던 세상 아닌가? 예전엔 시골에서 농사 짓는 것만이 천직이라 생각했지만 내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북해도 탄광부로, 사할린 벌목공으로 일하면서도 내 후손은 나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으리라.
내 나라, 내 고향이 어디 따로 정해져 있는 곳이 아니라 마음 가는 곳, 살고 싶은 곳이 내 고향이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내가 아끼고 지켜야 하는 것이 있는 그곳이 바로 내 나라 아니겠나.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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