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청역 참사를 계기로 급발진 사고를 예방할 수 있도록 차량 제조사들이 페달 오조작 방지 장치, 페달 블랙박스 등을 의무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2017년 배우 김주혁씨 급발진 의심 사망 사고, 2022년 강릉 12세 아동 급발진 의심 사망 사고 등 인명 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급발진이 주요 원인으로 거론되는 만큼 소모적인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정부가 관련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다만 차량 제조사들은 비용부담 주체, 책임 범위가 명확하지 않은 만큼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대부분 차량 제조사들은 지난 1일 발생한 시청역 사고에 대해 급발진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익명을 요구한 A사 관계자는 "대개 급발진은 운전자가 자의적으로 운행을 종료할 수 없어 매우 강한 물리적인 힘을 가해 강제적으로 운행이 끝난다"면서 "급발진으로 보기엔 브레이크 등이 들어와 있고, 차량이 부드럽게 멈춰 섰다는 점에서 이번 사고는 급발진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B사 관계자도 "사고 당시 상황을 저장한 EDR을 분석해보면 명확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면서 "육안으로 보기에도 100% 급발진으로 보기 어려운 정황이 많다"고 말했다.
차량 급발진은 가속 페달을 밟지 않았음에도 엔진에서 비정상적인 굉음이 나며 운전자 의도와 다르게 차량이 빠르게 발진하는 현상을 말한다. 아직 급발진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탓에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운전자 착오인지, 제조사 결함인지 다툼이 치열하다. 현행법은 사고 원인이 자동차 결함으로 의심될 때는 소비자가 이를 입증해야 한다. 국내에 100% 급발진 사고 사례가 드문 이유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급발진 사고 시 소비자 입증 의무를 완화한 일명 '도현이법(제조물 책임법 일부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임기 내 통과되지 않아 자동 폐기됐다. 이에 소비자들은 차를 만들 때 제조사가 처음부터 페달 블랙박스를 장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차량 제조사들은 이미 자동차 사고기록장치(EDR)에 사고 당시 사항이 기록되는 만큼 페달 블랙박스 등은 실효성이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EDR에는 일정 시간 동안 주행속도, 엔진 회전수, 가속페달 변위, 스로틀 밸브 변위, 제동 스위치, 조향 핸들 각도 등 운행 정보가 저장된다. 또 충돌 시 속도 변화, 가속도, 전복 각도, 에어백 등 데이터 정보도 기록된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급발진 유무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이미 EDR에 차고 넘치기 때문에 페달 블랙박스는 일종의 과잉 스펙"이라며 "EDR이 기록하지 못하는 정보는 페달 블랙박스를 설치한다고 해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블랙박스는 대부분 외주 생산이고 차량 상태에 따라 방전, 기록 단순 저장 오류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책임을 100% 완성차 업체가 짊어져야 한다는 건 과도한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관계자는 "차량 제조사들은 '급발진은 기술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페달 블랙박스를 설치하는 순간 그 주장을 스스로 뒤집는 꼴"이라며 "페달 블랙박스를 제조사 차원에서 설치하는 것 자체가 기술적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페달 블랙박스 기능 추가로 인한 옵션 비용, 페달 블랙박스 오작동에 따른 보험 범위 등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한편 급발진 사고와 관련한 소모적인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 국토교통부는 지난해부터 제조사에 급발진 의심 항목인 '마스터 실린더 제동압력'을 EDR 선택 항목으로 도입할 것을 권고했다. 또 소비자에게는 '차량 구매 시 페달 블랙박스 장착'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안 모두 강제성이 없는 선택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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