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다.”
신채호 선생이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식민사관과 그 영향을 받아서 편찬된 일부 국사 교과서를 비판하기 위해 쓴 ‘독사신론(讀史新論)’ 중 일부분이다.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또 바로 기억해야 한다. 본지가 2025년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연중기획 첫 번째 시리즈로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1846~1922)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동농 김가진 선생은 제국(帝國)의 대신으로, 민국(民國)의 국민으로 나라를 위해 한평생을 살았다. 조선말 외교관으로 청나라·러시아·일본 사이에서 구국외교를 펼쳤고, 1919년 4월 국내 최대의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대동단을 창설했다. 74세 나이로 상해에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고문 역할을 했다.
1846년 출생한 김가진은 만 40세가 되던 1886년 과거에 급제, 외교관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 등을 공부했다. 중국 천진에 종사관으로 부임했고, 이후 주일공사 대리를 거쳐 주일공사로서 4년을 역임했다.
고종의 최측근 외교관 고위 관료였던 김가진은 고종의 가장 중요한 ‘대일창구’였다. 1894년 갑오년에 일본 군대가 경복궁을 에워쌌을 때, 김가진은 혈혈단신으로 일본군 포위망을 뚫고, 고종의 안위를 지켰다.
김가진은 1896년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해 위원으로 활동했다. 동농은 1909년 대한자강회의 계승단체인 대한협회의 2대 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를 부활시켜 민의를 결집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반대운동을 주도하는 등 일진회의 소위 ‘합방운동’에 합법적으로 대항했다.
이후 김가진은 국운이 기울어가던 때 민영환과 함께 구국의 방도를 상의했고, 러일전쟁 와중에 수감 중이던 이승만 전 대통령을 석방해 미국 유학을 주선했다.
김가진 선생은 1919년 4월 국내 최대의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대동단을 창설하고 총재에 취임, 선언문 작성과 만세 시위 조직 등을 주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해 적극 활동했다.
대동단(大同團)이라는 이름에는 양반과 노비를 비롯한 모든 신분제를 타파해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이 항일투쟁에 하나가 되기를 염원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대동단은 종교인과 여성, 백정, 보부상, 그리고 학생까지 망라했다.
전협, 최익환 등이 김가진 선생을 총재에 상징적으로 추대한 것이라는 주장도 일부 제기되고 있으나, 김가진 선생은 대동단 창립 당시부터 독립선언서를 직접 작성하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또 전협, 최익환 등이 체포된 이후에도 의친왕 이강의 망명을 추진하고, 상해 망명 이후 2차 독립선언서와 포고문을 작성했으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등 대동단의 활동을 직접 지휘했다.
무엇보다 항일조직의 총재가 되는 길은 험난했다. 본인뿐만 아니라 온 집안의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인 만큼 본인의 확고한 의지와 결단 없이는 불가능했다.
동농은 상해를 대동단의 새로운 근거지로 결정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했다. 이 망명은 당시 세계 각국에 일제강점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김가진 선생은 상해 망명 이후 순종의 친동생인 의친왕 이강의 망명을 추진하는 등 독립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상해로 망명한 김가진은 제2차 독립선언서와 포고문을 작성해 배포하는 등 강도 높은 독립운동을 했고, 독립운동자금 모집 및 초청 강연 등의 활동도 적극 전개했다.
특히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며느리인 정정화 선생에게도 국내에 들어가 우달 민영달 등을 포함해 여러 사람들을 접촉하고 ‘김가진 선생이 직접 작성한 암호 편지’를 전달하도록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가진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선생을 국노(國老)로 모시고 3·1절 1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김가진 선생은 김좌진이 조직한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추대됐다.
◆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의 인식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가진 선생의 독립운동에 관한 기여를 인정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장’으로 선생의 서거를 애도했다.
김가진 선생은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한일합방,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격변의 역사를 살아온 인물이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때는 외교관이자 관찰사로서 고종을 보필했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대동단 총재로서 항일독립운동을 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원로로서 중심을 잡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충분히 고려해 그 삶과 활동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김가진 선생은 대한제국의 대신 중 유일하게 74세 고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의 정통성과 법통을 지닌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해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고문으로 추대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선생이 서거하자 당시 정부 요인 7인의 호상으로 사실상 ‘대한민국임시정부장’으로 선생의 독립운동에의 기여를 기리고 서거를 애도했다. 이는 당시 독립신문과 동아일보 등에 상세하게 보도됐다.
임시정부에서 동농 김가진 선생의 장례식을 국장(國葬)으로 성대하게 거행했음에도 오늘날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동아일보 1922년 7월 7일자 기사는 그가 상해 망명 이후 독립운동을 하며 극빈한 삶 속에 서거한 모습을 묘사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귀족의 직위를 받은 자로서 조선 안에서 독립을 주장한 사람은 김윤식 이용직 양씨가 있었으나 해외에 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한 사람은 오직 혼자다.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의 수령으로는 가장 연고한 사람으로 조선 독립을 뜻하는 사람에게 공경을 받았으며 상해에 건너간 이후의 고생은 거의 극도에 이르러 팔십지년에 하루 한 끼를 먹지 못해 추위가 극에 다다른 가운데 이 세상을 마쳤더라”고 전했다.
그 외에도 김가진 선생이 임시정부의 대통령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는 점, 무장파·준비파·외교파 등 상해의 모든 파가 선생을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모셨다는 점, 임시정부의 3·1절 1주년 기념식 자료에서도 단상에 있는 선생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등을 함께 고려했을 때, 김가진 선생은 임시정부의 고문으로서 실질적이고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전라도뱃떼지를갈라쥬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