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22) 더 높은 경지를 희구하다 - 갱상일층루(更上一層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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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혁 에세이스트
입력 2024-08-12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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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혁 에세이스트
[유재혁 에세이스트]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방문했을 때 시진핑 주석이 서예 작품 한 점을 액자에 담아 선물했다. 액자에는 한시 두 구절이 씌여 있었다.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욕궁천리목 갱상일층루)." 당나라 시인 왕지환의 5언절구 '등관작루(登鸛雀樓관작루에 올라)'의 후반부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밝은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황하는 바다로 흘러간다
천리 끝까지 바라보고 싶어 누각을 한 층 더 오른다

친구들과 관작루에 놀러갔다. 날이 저물어 일행은 죄다 내려가는데 나는 좀 더 멀리 바라보고 싶어 오히려 한 층을 더 오른다. 비록 날이 어두워져도 멀리 보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못할 게 무언가. 곧 달이 떠 세상을 훤히 비춰줄 텐데. 살기 힘들어도 실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의지를 굳게 하라고 격려하는 시다. 조금 더 노력하여 한 단계 더 올라가자고 마음을 다지는 시다. 시진핑 주석은 이른바 시를 건네 마음을 전하는 '부시언지(賦詩言志)'를 한 것이다. 양국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자는 정치적 함의가 담겨있음은 물론이다. 

샨시성(山西省) 서남부 황새 서식지 갈대숲에 세워진 3층 누각 관작루는 무창의 황학루, 동정호의 악양루, 남창의 등왕각과 함께 중국 고대의 4대 누각으로 꼽힌다. 멀리 중조산(中条山)과 마주하고 굽이쳐 흐르는 황하가 내려다보여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시문과 서화를 남긴 곳이다. 왕지환은 20세가 되기 전에 문리를 깨우친 수재였다. 기질이 호방하여 일찌감치 관직을 내던지고 십수 년간 천하를 주유하며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를 도처에 남겼다. 

왕지환의 '등관작루'는 관작루를 소재로 한 30여 시 중  최고 걸작으로 중국인 애송시 No.4다. 특히 마지막 구절 
'更上一層樓'는 이 시를 천고에 빛나는 절창의 반열에 오르게 했으며 '한 단계 진일보하다', '더 큰 성과를 올리다', '현재보다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간다'는 뜻의 성어로 자리잡았다. 각종 광고 문구로 많이 활용되고 있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건배사로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지구촌을 스포츠의 열기로 보름간 달구었던 파리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금메달 5개에 종합순위 15위'라는 소박한 목표를 내건 우리나라 대표단은 금 13개를 수확하고 종합 8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최소 규모의 선수단에 역대 최약체란 평가를 받았다지만, 목표와 성적의 편차가 워낙 크다 보니 전력 분석이 주먹구구식이었거나 다른 꿍꿍이가 있어 의도적으로 목표를 낮게 잡은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등장했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총, 칼, 활에서만 무려 10개의 금메달을 따내 '전투의 민족'이라는 유쾌한 별명을 얻었는가 하면 손에 무기가 없으면 금메달을 못딴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돌아 온국민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끈 것은 메달 색깔에 연연하지 않고 올림픽을 즐기는 태극전사들의 쿨한 태도다. 우리 선수들의 표정은 진지하되 비장하지 않다. 이기면 포효하되 울지 않고 져도 낙담하지 않는다. 금메달을 따면 눈물범벅이 되거나 은메달을 따고도 기뻐하지 못하고 국민들께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일은 이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기든 지든, 메달을 따든 못 따든, 메달 색깔이 어떠하든 선수들의 미소가 눈물을 대신했다. 금메달을 따면 "내 자신을 믿었더니 되더라"며 환하게 웃었고, 목표한 결과를 얻지 못하면 "아쉽지만 더 노력해서 다시 도전하겠다"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기는 올림픽에서 즐기는 올림픽으로의 변화, 이 변화의 중심에 Z세대*가 있다. 올림픽에 참가한 태극전사들 대부분이 2000년대에 태어난 '영 코리안'들이다. 성적에 대한 심적 압박에서 벗어나 도전을 즐기니 오히려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린다.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거둔 핵심요인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번 대회 한국 메달리스트 44명의 평균연령이 25.1세이고, 절반이 넘는 24명이 2000년 이후 태어났다.

국내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태극전사들을 응원하는 또래들도 메달 색깔이나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한다. 이들은 '공정'에 목마른 세대다. 스포츠든 입시든 취업이든 삶의 어느 분야에서든 공정한 경쟁을 추구한다.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면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 패자를 위로하고 승자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우리 선수들의 성숙한 모습에 세계인들이 찬탄해 마지않는다. 전 종목을 석권하고 여자 단체전 10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양궁은 물론이고,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선수들이 예상치 못한 금밭을 일궈낸 사격 또한 공정에 만전을 기한 선발과정이 호성적의 밑거름이다. 안세영 선수가 금메달을 딴 감격스런 순간에 배드민턴협회를 향해 터뜨린 작심 발언 역시 공정을 중시하고 할 말은 하는 Z세대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사상 유례없는 가마솥 폭염에 지치고 여야의 소모적 무한정쟁에 넌더리를 내던 국민들이 파리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모처럼 살맛이 났다. 올림픽에서 땀흘리고 돌아온 모든 선수들에게 덕분에 행복했다는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아쉽게 메달 획득에 실패한 선수들, 메달은 땄으나 금메달을 놓친 선수들에게는 격려와 응원의 말을 보탠다. 경기를 마치고 보여준 바와 같이 더 노력하여 다시 도전하겠다는 의연한 마음가짐으로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선다면 반드시 4년 뒤 더 큰 성과를 올릴 거라는.

"은메달을 따고 보니 '내가 이 정도까지 할 수 있구나. 더 높은 데까지 올라갈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생겼어요. 지금은 여행 하고 쉬기보다는 바로 유도 하고 싶어요." 여자 유도 -57kg급에서 은메달을 따고 돌아온 허미미 선수의 말이다. 


* Z세대는 일반적으로 1990년대 중반에서 2010년대 초반에 걸쳐 출생한 세대를 이른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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