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올 들어 반도체 장비 구매를 대폭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과 미국, 대만 등 주요 반도체 선진국들이 세계 경기 둔화로 장비 투자를 줄인 것과 대비된다. 미국이 대(對)중국 반도체 제재 고삐를 점점 더 세게 죄어오는 상황에서 중국은 추가 제재에 대비함과 동시에 반도체 자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3일 대만 중앙통신사,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아시아판 등에 따르면 클락 쳉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 수석이사는 전날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세미콘 타이완 2024’ 기자 회견에서 중국이 올해 상반기 250억 달러(약 33조원) 규모의 반도체 장비를 사들였다고 밝혔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90% 증가한 수준으로 한국과 미국, 대만 등 3개국의 장비 구매액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많다. 이 기간 반도체 제조 장비에 대한 투자를 늘린 국가는 중국이 유일하다. 글로벌 경기 둔화 흐름 속에 한국과 대만, 미국의 반도체 장비 투자는 모두 전년 대비 감소했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업체 SMIC와 같은 대형 업체를 비롯해 규모가 작은 중소업체들도 장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쳉 수석이사는 “중국 반도체 제조업체 최소 10곳 이상이 새로운 장비를 공격적으로 구매하고 있다”며 “이는 중국 전체 (투자) 지출을 견인하고 있다”고 짚었다.
중국이 이처럼 반도체 장비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이유는 미국의 추가 제재에 대비하고 이에 맞서 반도체 자립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쳉 SEMI 수석이사는 “중국이 성숙 공정 반도체 제조 시설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계속 구매하고 있다”며 “추가 수출 통제에 대한 우려는 중국이 미리 구매할 수 있는 더 많은 장비를 확보하도록 압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반도체 자립을 실현하기 위해 반도체 제조 공장을 빠르게 늘리고 있고, 이는 반도체 장비 수요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독일·일본 등은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자국 내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도록 하기 위해 대규모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세워지는 반도체 공장 수를 따라가지 못한다. SEMI에 따르면 올해 새로 문을 여는 세계 신규 반도체 공장 42곳 중 18곳이 중국 공장이다.
더구나 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수입이 막힌 중국은 구형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를 여러 번 돌려 반도체를 생산하는 ‘이가 없으면 잇몸’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그만큼 장비가 많이 필요한 것이다. ASML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EUV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기업이지만, 미국의 요청으로 대중국 수출을 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최근 대중국 제재 고삐를 더욱 세게 죄면서 ASML에 이미 중국에 판매한 장비에 대한 유지·보수까지 중단하도록 압박하고 있는 것도 중국의 '장비 사재기'를 부추기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딕 스호프 네덜란드 총리는 지난달 30일 “(추가 수출 제한 가능성에 대해) 현재 논의 중이며 ASML의 경제적 이익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매출 비중이 절반에 육박하는 ASML은 중국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계속 제공한다는 방침을 고수해 왔지만, 계속되는 압박에 추가 제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ASML이 미국의 요구에 따른다면 상반기 중국이 급하게 들여온 장비들은 내년부터 제대로 가동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와중에 전날 블룸버그는 일본이 새로운 대중 반도체 설비 제재를 시행할 경우, 중국이 경제 보복에 나설 것을 일본에 경고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반도체 자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국이 일본에게 미국 주도의 대중 반도체 제재에 동참하지 않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세계 최대 반도체전인 '세미콘 타이완 2024'는 4일부터 사흘간 대만에서 열리는 가운데 엔비디아, 구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글로벌 기술 대기업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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