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하를 발목 잡는 주요 원인으로 가계부채를 지목한 가운데 국제기구에서도 가계부채가 한국 경제 성장을 짓누르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과거엔 부채가 성장을 촉진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긍정적 영향보다 부정적 영향이 더 큰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경고장을 날렸다.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각국 중앙은행의 중앙은행이라 불리는 국제결제은행(BIS)은 최근 발표한 정례 보고서에서 2000년대 초 이후 저금리 기조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대부분 신흥국에서 민간신용이 큰 폭으로 확대됐다고 지적했다. 민간신용은 금융기관을 제외한 기업, 가계 등 민간 비금융부문의 부채를 의미한다.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신흥국에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신용 비율은 2000년 이래 1.3배 이상 올랐고 중국에서는 이 비율이 2배 가까이 상승했다. 민간신용 증가는 부채가 늘면서 자금 조달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고 실물자산이나 교육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면서 성장에 기여하는 바가 있어 반드시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민간신용 증가만으로는 성장을 유발하는 데 한계가 있으며 일정 수준 이상에선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한다고 BIS는 강조했다. 부채와 성장의 관계가 처음에 정비례하다가 어느 순간 꼭짓점을 찍고 반비례로 돌아서는 '역 U자형' 곡선을 그린다는 것이다. 빚을 내서 소비를 늘리면 단기적으로 성장률이 높아질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부채 상환과 이자 지급 부담 때문에 미래 성장 잠재력이 약화할 수 있다.
한국의 GDP 대비 민간신용 비율은 지난해 말 222.7%(BIS 기준)에 달해 100% 선을 훌쩍 뛰어넘은 상황이다. 이 중 가계부채가 100.5%, 기업부채가 122.3%였다.
한은이 발표한 '8월 중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은 전달보다 9조3000억원 늘어난 1130조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집값 급등기였던 지난 2021년 7월(9조7000억원) 이후 최대폭이자 역대로는 9번째 증가폭을 보였다. 이 중 주담대는 890조6000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9월 한 달 동안 8조2000억원 늘며 통계 작성 이후 최대 증가폭을 보였다. 18개월 연속 증가세기도 하다.
BIS는 가계부채가 증가하고 주택 수요가 느는 동안 제조업을 비롯한 다른 업종에서 건설·부동산업으로 신용이 옮겨가는 현상에 주목했다. 건설·부동산업의 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만큼 해당 업종에 대한 과도한 대출 쏠림이 성장에 또 다른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건설업과 부동산업 대출 비중이 더 많이 증가한 국가일수록 총요소생산성과 노동생산성 감소는 더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형태의 신용 재배분은 과잉 투자를 의미할 수 있으며 나중에 관련 대출 증가가 둔화한 뒤에도 생산성과 성장에 지속해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BIS는 분석했다.
BIS는 "역 U자형 관계는 고정적이지 않다"며 "정책 대응을 통해 민간신용의 성장에 대한 역 U자형 관계는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불균등한 신용 증가의 완화, 주식시장의 역할 확대, 핀테크를 통한 금융중개 기능의 발전 등으로 생산성이 높은 부문으로 신용이 유입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최근 한은의 통화정책운용 방향 및 분석과도 일맥상통한다. 한은은 최근 통화정책에서 집값 상승과 가계부채 급증에 따른 위험을 핵심 고려 사항 중 하나로 설정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달 22일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직후 기준금리를 동결한 배경을 설명하며 "부동산 가격과 그에 따른 가계부채 증가 위험신호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부동산 경기 부양으로 손쉽게 경제를 이끌어오던 과거 정책 대응의 문제점을 꼬집으며 "그런 고리는 한 번 끊어줄 때가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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