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은행 가계대출 규모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 주요국 통화정책 전환(피봇)에 대한 기대감이 시장금리를 끌어내리고, 금융당국의 관련 규제 확대를 앞두고 이른바 ‘막차 수요’가 대거 발생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통화긴축 시기부터 금융당국이 갈팡질팡하면서 가계대출 관리에 실패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가계대출 증가 규모는 지난달 9조3000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부동산 시장이 반등하면서 주택담보대출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2단계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시행 전 막차 수요, 주식투자 수요 등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가계대출 규모 급증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올해 들어 수도권을 중심으로 아파트 매매가 늘면서 5조1000억원(4월), 6조원(5월), 5조9000억원(6월), 5조4000억원(7월) 등 급증했다. 이에 금융당국은 스트레스 DSR 규제를 시행하고 이를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등 가계대출 증가세를 억누르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은행권도 가산금리를 여러 차례 올리는 방식으로 대응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처럼 가계대출이 늘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오는 18일(현지시간) 예정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인하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미국 기준금리 인하는 시차를 두고 금융소비자들이 체감하는 금리가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실제로 3개월 전 연 3.5% 수준을 웃돌던 금융채(무보증·AAA) 1년물·5년물 가격은 미국 기준금리 조정 전망 추이에 발맞춰 하락을 거듭했다. 금융채 가격은 한 달 새 연 3.3% 수준까지 떨어졌고, 이후 1년물은 연 3.3%, 5년물은 연 3.2%를 중심으로 등락을 반복해왔다. 지난 13일 기준 금융채 1년물·5년물 금리는 연 3.238%·3.145%다. 금융채 금리 하락이 이어지면서 지난 6월에는 국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주택담보대출 금리 하단이 2%대까지 떨어지는 등 은행들의 여신상품 금리가 낮아지기도 했다.
문제는 가계대출 증가세가 여전한 상황에서 금리 인하기를 맞았다는 점이다. 금리 인하기를 맞으면 대출상품 금리도 낮아지면서 가계대출 규모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금융당국이 2단계 스트레스 DSR 시행을 2개월 미루면서 막차 수요 폭발을 스스로 초래했다. 하반기 들어 가계대출 규모가 급증하자 금융당국은 은행권에 강한 가계대출 증가세 관리를 주문했고, 이후 실수요자들이 ‘대출 절벽’에 내몰리자 한발 물러서는 등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금융당국이 이처럼 우왕좌왕하는 이유를 두고 지난해 고금리 시기에 가계대출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금리가 내리면 대출이 늘어나는 게 당연한데, 금리가 오를 때 대출 규모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폭풍을 지금 맞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통화당국은 작년 1월 기준금리를 연 3.5%로 끌어올린 뒤 이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당국은 작년 초 ‘상생금융’을 빌미로 은행권을 압박해 대출상품 이자를 오히려 낮추는 등 통화당국과 엇박자를 냈다. 그 결과 지난해 국내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은 37조1000억원 늘었다. 기준금리가 연달아 오르던 2022년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이 2조8000억원 줄어든 것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수치다.
이와 관련해 금융권 전문가는 “요즘처럼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 시기에는 정부가 결단을 내리거나 아예 시장에 맡겨야 한다”며 “상반된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욕심이 부작용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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