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무차별적으로 다량의 소송을 제기하는 '소송왕' 때문에 대법원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소송왕의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의 상고가 줄을 이어 사법 자원이 낭비된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상고 사유를 사전에 심사하는 '상고심사제' 도입에 대한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2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송석준 국민의힘 의원이 대법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6월 30일 기준 대법원이 심리 중인 민사 사건은 총 7283건인데, 그중 정모씨가 낸 소송이 3830건(52%)에 달한다. 한 사람이 절반 넘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정씨는 소송을 제기할 때 내야 하는 인지·송달료도 제대로 내지 않고 소송이 각하되면 불복해 항소하거나 대법원 판결에는 재심을 청구하는 식으로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2019년부터 지난 6월까지 5년 동안 대법원에 총 3만7425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고법에 1만5937건, 서울중앙지법에 1만4328건을 제기했다.
송석준 의원은 "전자소송의 편의성을 악용해 무분별하게 수백 건, 수천 건의 소장을 제출하거나 의미 없는 대용량의 증거자료를 반복적으로 제출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며 "소권 남용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송왕'이 법원의 행정력 낭비를 초래하고, 재판 지연으로 연결되는 등 문제가 심각하자 해결 방안으로 '상고심사제'가 주목받고 있다. 상고심사제는 법에 정해진 상고사유를 상고이유서에 포함하고 있는지를 고등법원 단계에서 사전 심사해 상고사유가 인정됐을 때에 한해 본안 심리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1월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상고심사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법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실제 개정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사실관계를 다투는 '사실심'인 1·2심과 달리 대법원은 법리를 다투는 '법률심'이다. 원심에 법리를 잘못 해석한 사유 등이 있어야 대법원에서 원심을 뒤집을 수 있다. 하지만 정씨 사례와 같이 단순히 사실관계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식으로 '묻지마 상고'가 잇따르게 되면 대법원으로서도 전원합의체로 넘어가는 일부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제외하고는 꼼꼼하게 사건을 검토할 수 없게 된다.
올해 취임한 신임 대법관들도 재판 지연 해결 방안으로 상고심사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노경필·박영재 대법관과 신숙희 대법관은 "장기적으로는 상고심에서 심리할 실질적인 사건을 선별하는 상고심사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법조계 내부에서는 상고심사제를 두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묻지마 3심' '소송왕' 등으로 인해 상고심 사건이 급증하고 정작 대법원의 판단을 받아볼 가치가 있는 사건들이 묻히는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상고심사제 도입 등 상고심 개혁을 통해 정말로 상고심 판단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재판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부장판사 출신인 다른 변호사는 "(만일 상고심사제가 도입되고) 상고 사유를 대법원 재량으로 판단하게 되면 상고심사제가 오히려 국민들의 재판청구권을 과도하게 침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며 "상고를 막는 방안보다는 충실한 하급심 심리를 통해 사건 당사자들이 판결을 납득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우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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