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지난 2003년 10월 9일 메모리 사업현장 보고 당시 했던 발언이다. 규모가 크거나 달성하기 어려워도 투자를 미루지 말고, 책임을 질까봐 겁내지 말고 경영자로서 과감히 결단을 내리라는 조언이었다.
이 같은 선대회장의 조언은 20년이 지난 지금의 삼성에게 꼭 필요한 말이 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은 10여 년 동안 삼성의 인수합병(M&A)은 2016년 하만 인수 밖에 없을 정도로 소극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1987년 경영을 이어받은 선대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봐라"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을 통해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기반으로 조직문화를 혁신했고, 전자·반도체·통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1등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재용 회장은 위기에도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2016년 '갤럭시 노트7' 배터리 발화사건 당시 경영진이 나서 사과하고 리콜 조치를 진행했을 뿐 뚜렷한 메시지를 내놓거나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2022년 '게임 최적화 서비스(GOS)' 사태에도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DX부문장)이 주주들에게 사과한 것에 그쳤다. 이 사건들은 향후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사업 경쟁력이 약화된 요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반도체 부진으로 '어닝 쇼크'를 발표할 때에도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DS부문장)이 사과문을 올렸다. 전문가들은 이때만큼이라도 이 회장이 직접 나섰다면 시장의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었을 거라며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이 회장 입장에서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이 회장은 2014년 선대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듬해부터 경영권을 쥐었지만, 이 과정에서 진행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을 받으며 2017년부터 현재까지 재판이 진행 중인 상태인 만큼 전면에 나서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올 초 1심에서 무죄를 받기는 했지만 100회에 달하는 법원 출석을 하면서 안정적인 경영 활동을 펼치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물론 이 회장이 '사법리스크' 중이라고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반도체, 바이오, 배터리 등 미래성장사업을 중심으로 틈틈이 현장경영 행보를 보였다.
이 회장은 코로나19 사태 당시 국내 백신 공급 확대를 위해 주요 계열사 임원들로 구성된 TF를 지휘하면서 백신 양산 체제를 갖추고, 화이자·모더나 최고경영진과 직접 협상하며 코로나 백신의 국내 위탁 생산을 성사시켰다. 이 회장의 이 같은 노력이 뒷받침되면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올해 1~3분기 누적 매출 3조2908억원, 영업이익 9943억8800만원을 기록하며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2019년에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면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 시스템반도체 분야 경쟁력 확보를 선언했다. 이를 위해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한다는 목표를 제시했고, 2021년에는 38조원을 더해 총 171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다만 파운드리는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선두업체인 TSMC와의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수율 문제가 발목을 잡으며 애플, 퀄컴, 엔비디아, AMD 등 빅테크 기업들이 TSMC로 몰려든 것이다. 아직까지 최대 고객이 자사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엑시노스'를 설계하는 시스템LSI사업부일 정도다. 이마저도 최근 갤럭시 스마트폰을 생산하는 MX사업부에서 엑시노스 탑재를 지양하는 추세다.
재계 한 관계자는 "시스템반도체는 사실상 전 정권에 등 떠밀린 보여주기성 투자였다"며 "대규모 투자로 재원이 분리되면서 기존 경쟁력도 분산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초격차'를 자랑하며 승승장구했던 기존 주력 사업들도 최근 들어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삼성그룹의 핵심 사업인 메모리 반도체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주도권을 SK하이닉스에 내주면서 주가 하락을 면치 못하고 있다. 미래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2019년 HBM 전담팀을 해체한 것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스마트폰 시장도 플래그십에서는 애플과 비교도 못할 정도로 벌어졌으며, 19년 연속 글로벌 1위를 달리고 있는 TV 역시 중국 업체들에게 점유율을 빼앗기고 있는 추세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선대회장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등 대외적인 활동을 보여줬던 장면이 있어서 전면에 나섰던 것처럼 비치는데, 생각보다 자주 나서진 않았던 것으로 안다"며 "하지만 이 회장은 가끔씩이라도 전면에 나서는 것이 보이지 않아 선대회장의 리더십이 지금에서야 재부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사법리스크에 얽혀있다 보니 전면에 나서기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지만, 위기의 삼성 속에서 이제는 존재감을 드러낼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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