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학이 자연과학으로 분류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전산 분야에서 노벨상을 석권하는 일이 최초로 올해 발생했다. 전산 분야 석학을 위시하여 우리가 잘 아는 알파고를 만든 소장파 전산 전문가들 총 5명이 자연과학 분야를 대변하는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받았다. 실질적으로 싹 쓸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수상자 중 물리·화학 전공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기이한 일이다. 이에 대해 자연과학계에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물리학상 수상자인 힌튼 교수의 이력을 물리학계에서는 특히 주목하면서 물리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조적인 말까지 나온다. 순수 전산학자로서 AI의 위험성에 대해 1년 전 경종을 울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물리학을 전공하거나 주력으로 연구한 경력은 전무한 까닭이다. 물리학자라고 부를 수 없는 인물이 사계 최고봉의 상을 수상했으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는 자연과학을 전공한 적이 전혀 없는 이들이 자연과학 쪽을 넘봤을까 하는 의문이다. 학문 간 인접성 관점에서만 봐서는 이에 대한 답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산학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본다. IT 산업에서 매출액 기준으로 하드웨어(HW) 산업 대 소프트웨어(SW) 산업은 40대60이지만 컴퓨터 내부에서는 그게 20대80이다. 전산학과 교과과정에서도 SW과목이 HW과목보다 4배 더 많은 것은 그런 배경이 있다. 컴퓨터 기술이 컴퓨터가 아닌 타 분야와 융합하는 역할은 HW보다는 SW에 훨씬 더 의존한다. 융합이란 사실상 어느 한 주력 분야가 다른 인접 분야를 파고드는 과정이다. 그래서 SW가 발전하는 어느 상위 단계에 이르러서는 SW가 컴퓨터 기술이 여러 다양한 분야를 파고들 것으로 전산학계에서는 내다봤던 것이다. 이런 예측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이루어진 일로 기초과학 분야 역시 이런 융합에서 열외가 아니었음이 명확히 증명된 것이다.
힌튼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학부 전산학과 출신으로서 최종적으로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전산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또한 화학상 수상자 3명 모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학부 전산학과 출신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의문은 왜 유독 영국 대학에서 기초과학 분야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자연과학을 꿰뚫는 인재를 동 시대에 배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국내 대학 현실만 봐서는 이에 대한 답 역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케임브리지대학과 에든버러대학 전산학과 교수 생활을 하여 영국 대학에 대해 잘 아는 필자로서는 이렇게 본다. 국내(한국)에서는 학부에서도 학생의 능력을 평가할 때 중등교육의 연장선상에서 거의 시험에 의존하지만 영국은 학부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시험은 없이 실험과 실증에만 철저히 의존한다. 그런 실험 과제를 수행하려면 문헌조사가 필수다. 성적도 A·B와 같은 등급 평가가 아니고 문헌 내용을 얼마나 파악했는지 또한 그 내용을 자기 시각에서 재해석했는지를 정량화함으로써 성적을 평가한다. 창의적 분석 노력을 중시한다는 말이다. 성적은 100분위 기준으로 최소한 50을 넘겨야 한다. 60점 이상이면 우등 성적으로 분류한다. 60이면 한국에선 D 수준에 해당하는 것으로 잘못 오해할 수 있으나 영국의 성적 부여 체계는 그렇지 않다. 영국에서 60은 한국 대학으로 치면 B+ 내지 A-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우리처럼 시험 위주 교육과 시험 전 요점 정리해주는 방식으로 평가할 경우 시험장에서 창의성 있는 답안이 과연 실시간적으로 나올지는 의문이다.
학부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 알파고를 만들었던 주역인 데미스 하사비스를 한번 살펴보자. 그는 케임브리지대 전산학과 재학 시절 학내 체스 동아리 회장을 지냈다. 알파고라는 컴퓨터 바둑 프로그램 코딩에 체스 실력이 분명히 응용됐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약관인 그가 바로 금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바둑에 응용한 경험을 화학 분야 단백질 분석에 똑같이 그대로 적용한 결과였다. 화학을 전공해본 적이 전혀 없는 알파고 개발팀 동료 2명도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세계 대학 경쟁력 순위 평가에서 왜 영국 대학들이 상위 10위 내에 5개나 들어가 있는지 그 이유를 잘 대변해주는 대목이다. 창의력과 응용력에서 앞선 까닭이다. 창의적 훈련을 거치지 못한 학부 졸업생들에게 알파고급 창의적 제품을 개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대학 경쟁력이 중요하다. 세계 10위 이내 대학에 영국 대학이 5개나 포함돼 있다고 하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영국이란 작은 나라가 놀랍게도 무려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오로지 창의적 교육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 대학 교육의 문제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도 세계 10위 이내에 드는 대학이 나오려면 대학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한줄기 서광은 비친다. 최근 전산학 랭킹에서 국내 대학 하나가 MIT(현 세계 13위)를 앞질렀기 때문이다. 세계 9위로 사상 최초로 10위 내에 진입했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MIT로 불려왔던 카이스트가 그 주인공이다. 그러던 MIT와의 관계를 역전시켰다고 하는 사실은 대단한 일이다. 미국컴퓨터학회 ACM의 랭킹 발표이기에 의미가 크다. ACM은 컴퓨터 분야 노벨상으로 불리는 튜링상을 제정한 학회로서 힌튼은 튜링상을 2018년에 받은 바 있다.
이번 수상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대체로 이렇다. 기초과학의 혁신은 한계에 봉착했으며 과학계의 연구방법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전산학에 의해서 가능해지기 시작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과학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을 앞으로는 IT기술이 아니고는 풀어내기 힘들 것이라는 해석과 과학의 경계선까지도 AI에 의해 허물어졌다고 하는 반응도 나온다. 그렇다면 기초과학이 설 땅이 완전히 사라졌단 말인가. 아니면 전산학이 기초과학을 대체할 것이라는 징조인가.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전산학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기초과학은 나름대로 원래의 위상이 있는 것이다. 연구 지평을 더 넓히지 못하는 자연과학계의 자체적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역할을 전산학이 대신 도맡아서 해주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번 노벨상은 전산학의 이러한 파괴력에 관해 생각하게 해주는 독특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타 분야까지 침투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은 다름아닌 바로 SW에 있다. 경계나 장벽에 무관하게 어디든 파고들 수 있는 SW의 타고난 본성 때문이다. SW 하나로 새로운 단백질을 설계해내는 데 성공했으며 또한 단백질 구조를 빠르게 예측하는 알파폴드(이 알파도 알파고의 알파와 같이 구글을 지칭)라는 이름의 검색엔진 SW를 개발하여 적용한 것이 결정타였다. 그러니까 실상은 이런 SW가 노벨상을 받게 해준 원인 제공자였던 것이다. 인류가 어떤 성격의 거시적 도전에 직면할 것인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은 중요하다. SW는 이러한 인류 난제를 발굴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쓰일 전망이다. 또한 난제 해법을 찾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이번 수상으로 돌이켜볼 일이 하나 있다. 창의성 부족에서 비롯되는 선진국과의 격차가 오늘날 삼성 위기와 난국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기업에서는 위기 때마다 고질적 행정 관료적 문화를 타파할 리더십 부재가 원인이라는 지적이 등장하나 그건 이번 위기에 관해서는 잘못된 분석이다. HW 시대에는 위기가 닥쳐도 신경영 전략 하나만으로도 헤쳐 나가는 길이 가능했으나 SW는 다르다. SW 개발 능력이 없이도 설계와 생산이 가능했던 메모리반도체 기술체계에만 의존하다가 SW 역량이 필수인 비메모리반도체 쪽에 대응하는 데 실패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라 그렇다. 삼성의 반도체 역사는 올해로 50년 됐다. 비메모리 시대 진입과 AI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적어도 30년 전부터 SW 쪽을 준비했어야 했건만 그냥 버텨 오기만 했다. SW는 공장에서 단숨에 찍어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번 위기는 오래갈 전망이다. 어디서든 SW 대 HW는 60대40 비중을 나타낸다.
반도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기업도 그렇지만 정부도 지난 30년간 SW에 관해서는 포기해왔다. 국가 정책과 인선을 HW 일변도로 실행해 온 점도 그런 대목이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AI 3대 강국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SW를 제대로 안 하면서 3대 강국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하다. 국내 언론계도 마찬가지로 어느 언론사에도 SW 담당 기자는 한 명도 없다. 반면 HW 반도체 취재팀은 넘칠 정도로 구성돼 있다. 영미는 다르다. 그들은 수십 년 전부터 SW 전문 기자를 두고 있다. 필자가 그들과 직접 인터뷰한 적이 25년 전 일이다. 이게 SW에 정면 대응하지 못하고 피해 다니는 우리의 불편한 진실이다.
돌이켜보면 전산학 역사는 올해로 꼭 80년 됐다. 영화 속에나 등장하던 계산하는 기계가 디지털 계산기의 형태로 1943년에 영국에서 제작되고 난 후로는 그만큼 된 것이다. 20년 후면 100주년이다. 즉 컴퓨터 역사 한 세기를 향하는 길목에서 전산학의 타 분야 침투가 본격화됐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제는 수상으로 심지어 자연과학 영역으로도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전산학은 종전의 기초과학 못지않은 연구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해당 분야에 필요한 검색엔진 SW를 알파폴드 격으로 특화하여 어느 분야를 위해서든 제작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검색엔진은 분야를 막론하고 예측의 정확도를 높이는 데 쓸모 있는 도구다. 따라서 SW 영향권 내에 들어올 분야는 점차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 물리·화학·생물로 대변되던 과학의 삼두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는 평가가 기초과학계 내부에서 나온 점을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전산학은 오늘날에 이르러 기초과학의 대열에 진입했다는 의미로 봐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전통적 3대 기초과학 분야 계보를 이어 전산학이 제4의 기초과학으로서 자리매김할 날이 도래한 것이 아닐까.
문송천 필자 이력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전산학 박사 ▷유럽IT학회 아시아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친선홍보대사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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