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을 하루 앞둔 지난 4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 중인 최선희 북한 외무상을 예고 없이 만났다. 이날은 러시아 공휴일인 '국민화합의 날'인데 휴일에 특별예우 차원에서 최 외무상을 크렘린 대궁전으로 불러 1분간이나 손을 맞잡은 채 인사말을 주고받는 장면을 언론에 공개한 것은 최근 양국 간 밀착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약 1만명의 병사를 파병한 사실을 아직 공식화하지 않고 있는 북한은 노동신문을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푸틴 대통령에게 보내는 "뜨거운 동지적 인사를 최선희 동지가 정중히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은 중대한 분수령에 섰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동맹국들과의 공조보다는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제로섬' 외교가 4년 만에 복귀하기 때문이다. 선거 기간 트럼프는 자신이 다시 당선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당장 종식시키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복원시키겠다고 공언해왔다. 트럼프는 미국의 최대 주적인 중국을 견제하고 상대하려면 러시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 트럼프는 내년 1월 취임 하면 3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전쟁의 종식을 위한 협상을 서두를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의 오랜 절친인 푸틴 대통령은 7일(현지시간)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발다이 토론클럽에서 트럼프의 당선을 축하하고 트럼프와 대화할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가 "역대 최저점"에 있다고 평가했다. 현 바이든 대통령의 재임 기간이 아직 남아 있고 트럼프가 언급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에 대한 발언도 취임 준비 과정에서 어조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구체적인 입장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트럼프와 푸틴의 '브로맨스'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2021년 백악관을 떠난 이후에도 푸틴과 여러 차례 통화해 우크라이나 종전 문제를 협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되기도 전부터 서로 경쟁적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속내는 걱정 반, 기대 반일 것이다.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미국의 동맹들은 자국의 방위를 미국에만 의존하기 어렵게 됐다. 한편으론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는 '협상의 귀재' 트럼프가 유럽 안보를 지킬 것이라는 기대감도 함께 공존한다. 이런 가운데 우크라이나는 트럼프가 러시아에 빼앗긴 영토를 포기하고 러시아에 유리한 조건으로 '조기 종전'을 압박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푸틴은 7일 포럼에서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나 유럽연합(EU)에 가입하지 않고 중립국으로 남고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 거주민을 대상으로 이 지역 합병을 선언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자국 영토를 온전히 지키며 서방에 추가 무기 지원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트럼프와 대화가 우크라이나 종전을 위한 협상으로 시작된다면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한 북한의 참전은 푸틴에게 유리한 정치적 지렛대를 제공하고 있다. 북한의 지원으로 러시아는 고갈되고 있는 전투 병력이나 지원 인력을 충원해 전쟁의 장기화에도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7월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6월 중순까지 러시아는 개전이후 대략 72만8000~46만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는 2022년 2월 침공 당시 전체 병력보다 많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전쟁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를 넘어섰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보도했다. 러시아는 현재 주민들의 반발을 우려해 강제동원령은 피하고 징병과 모병을 혼합하여 병력을 운용하고 있다.
미 대선을 코앞에 두고 북한이 러시아와 군사적 협력을 가속화하며 파병까지 한 것은 김정은 위원장에겐 엄청난 도박이다. 파병을 결정하게 된 이유를 들자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결국은 김정은 정권의 생존과 연관된다.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발사로 서방의 대북 제재가 풀리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고립과 경제난은 장기화되고 있다. 만성적인 식량난에 지난여름 대규모 수해까지 겹치면서 북한 지도부는 먹고사는 문제 해결에 정권의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에 파병은 '돈'이다. 북한은 파병 대가로 러시아 측에서 에너지, 식량 등 경제적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통해 북한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정권 유지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 우리의 월남 파병 때처럼 전투 현장에서 실전 경험을 얻을 뿐 아니라 러시아의 고도화된 군사기술과 무기체제를 이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리스크도 크다. 전쟁의 교착 상태가 장기화되고 북한의 군인들이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러시아군의 '총알받이' 신세로 전락하고 이 사실이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지면 김정은 위원장의 체제는 크게 흔들릴 수 있다.
북한과 러시아는 트럼프의 재선을 예상하고 대미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파병에 합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파병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확전의 길로 치닫게 할 우려가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본토까지 공격하는 미국의 장거리 미사일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확전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세가 팽팽하게 유지되는 가운데 북한제 포탄과 미사일의 공격에 우크라이나군이 심각한 위험에 처한다면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사용 제한을 해제해야 할 상황도 올 수도 있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20년 유예하고 현재 전선을 동결한 채 비무장 지대를 조성하는 종전 구상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으나 아직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재집권에도 불구하고 북·러 간 급속 밀착이라는 변수로 북·미 구도는 제1기 때와 크게 달라졌다. 러시아는 중국의 도움으로 경제파탄 없이 서방의 제제를 이겨내며 지금까지 전쟁을 이끌고 왔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국 압박정책과 우크라이나 전쟁은 강력한 북·중·러 삼각형 연대를 탄생시켰다. 트럼프는 김정은과 2018년 싱가포르 회담, 2019년 하노이 회담 등 3차례 만나 양국 간 관계 개선을 위한 북·미 정상회담을 했다. 회담이 중단된 이후에도 이른바 '러브레터'를 서로 주고받으며 우의를 다졌다. 북·미 정상회담이 북핵 문제 해법에 대한 견해 차이로 특별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지만 그의 집권기간 진행된 남북과 북·미 간 대화는 한반도에 긴장을 완화시키고 한반도에 평화 기조가 정착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의 재선을 크게 반기고 있을 것이다. 해리스 부통령이 당선되었더라면 바이든 행정부의 북한에 대한 '전략적 인내' 정책이 이어지며 북·미 간 대화 창구는 계속 열리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트럼프는 이번 선거 과정에서 "김 위원장과 잘 지냈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자신만이 김정은을 다룰 수 있다고 호소했다. 트럼프 2기 북·미 정상회담은 과연 재개될 것인가?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현시점에서의 전망은 큰 의미가 없다. 다만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더라도 1기 때처럼 북한과 '비핵화'를 주제로 한 협상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됐다. 또한 앞으로 비핵화 협상은 없다는 게 북한의 확고한 입장이다.
트럼프에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뿐 아니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긴급한 외교안보적 현안이 산적해 있다. 즉 북·미 간 접촉이 2개의 전쟁이 어느 정도 정리된 이후 타진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북한의 파병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면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정책 무게추를 한반도로 옮기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설득력이 있다.
트럼프는 3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도록 만든 미 수정헌법 22조에 따라 이번에는 4년 임기를 끝으로 물러나야 한다. 이에 따라 트럼프의 대외 정책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공화당은 하원에 이어 상원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트럼프 2기 외교정책과 국정 동력에 강력한 힘이 실릴 전망이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방어에 미국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유럽 국가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토 회원국들에 우크라이나 전쟁 수행을 위해 미국이 지출한 수천억 달러의 비용에 대한 청구서를 내밀 가능성도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미국의 동맹 중시 외교를 복원시키고 우크라이나 방어를 위해 유럽의 무기 지원을 이끌어냈다. 물론 우크라이나에 대한 최대 지원자는 미국이었다.
나토 해체까지 운운하며 방위비의 대폭 인상을 주장하는 트럼프의 재집권은 분명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주요 변수이다. 이런 가운데 북한의 참전으로 전쟁의 양상이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박인규 프레시안 상임고문과 대담하면서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핵 보유를 전제로 한 북·미 협상의 의사가 있다고 신호를 보낸다면, 또 트럼프 집권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서 러시아에 파병해서 받아내려고 했던 경제적 보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미국에서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김정은은 미국에 이를 요구하면서 협상에 나설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북한군 활동에 따라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까지 직접 지원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북한군의 관여 정도에 따라서 단계별로 우리가 지원 방식을 바꿔나간다"며 "무기 지원을 배제하지 않고, 만약 하게 되면 방어 무기부터 우선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7일 트럼프 당선자에게 축하 인사를 하면서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 문제를 논의했다. 트럼프 당선자의 입장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윤 대통령은 최근 미 뉴스위크와 인터뷰하면서 "북한이 핵공격에 나선다면 한·미 핵 기반 안보동맹에 기초해 즉각적인 핵 타격이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남북 간 대화의 창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은 헌법까지 개정해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이제는 북에 남한이 하나의 타국이며 제1 적대국이 된 것이다. 북측은 오물풍선을 보내더니 남북 간 연결도로와 철도까지 끊고 군사분계선을 요새화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거나 군대까지 보낸다면 한반도 상황은 어떻게 될까? 이국 멀리에서 남과 북이 나토와 러시아의 대리전을 치르게 된다. 이러한 대리전은 일촉즉발의 한반도로 옮겨갈 수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다.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10%대까지 추락했다. 그의 대북 강경책이 안보적 위기 때문만이 아니라면 정말 큰일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