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들도 정년 연장에 본격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근속연수가 긴 기업을 중심으로 시니어 직원 수를 줄이며 인건비 효율화에 나섰다. 내년에는 30대 그룹 전반에서 한국보다 앞서 정년 연장을 시도한 일본 기업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모습이 확산될 전망이다.
21일 재계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은 정치권에서 추진하는 정년 연장(계속고용제도) 법안을 놓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제조업에서 관심이 크다. 정년 연장이 만약 퇴직 후 재고용 대신 일괄 65세 연장으로 결정되면 인건비 상승에 따른 실적 악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경제인협회 조사에 따르면 한국 기업 10곳 중 7곳이 정년이 연장되면 경영에 큰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부담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로는 연공·호봉급 체계에 따른 인건비 부담 가중(26.0%)을 꼽았다. 정년 연장 방법으로는 퇴직 후 재고용(71.9%)을 원하는 비율이 높았고, 일괄 정년 연장(24.8%)과 정년 폐지(3.3%)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다만 숙련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점 등을 이유로 한국 기업 10곳 중 8곳이 정년 연장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사람인이 기업 461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79.8%가 정년 연장에 긍정적이었으며 원하는 평균 정년은 65.7세로 집계됐다.
일부 국내 기업은 정년 연장에 대비해 조직 다운사이징에 착수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직원 근속연수가 22년으로 국내에서 가장 긴 기업 중 하나인 KT다. KT는 최근 사무·현장직 2800명이 퇴직했고, 네트워크 운용 자회사 KT 넷코어와 KT P&M으로 1700명을 보냈다. 전체 직원 중 5분의 1을 일시에 내보낸 것이다.
KT는 인원 감축 이유로 AICT 기업 전환에 따른 효율성 제고를 꼽았지만 재계에선 다르게 본다. 정년 연장에 앞서 고임금 시니어 근로자를 미리 감축함으로써 장기적인 인건비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전략이다. KT는 여기에 정년퇴직한 근로자 중 일부를 3년간 촉탁직으로 재고용하기로 하는 등 퇴직 후 재고용 제도 효과도 자체 검증하고 있다. LG유플러스 자회사인 LG헬로비전도 근속연수 10년 이상인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으며 조직 슬림화에 나섰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안정적으로 영업이익을 내는 기업임에도 선제적 인력 감축에 나서는 모습이 관측된다”며 “이는 정년 연장에 대비하기 위해 장기근속자를 줄이려는 행보이며, 경영상 어려움에 근속연수와 관계없이 희망퇴직을 받는 것과는 다른 사례”라고 설명했다.
일본 기업 사례를 한국 상황에 맞게 고쳐서 들여오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질 전망이다. 일본 정부는 2013년 기업에 65세까지 고용할 의무를 부과한 데 이어 2021년에는 70세까지 일할 기회를 주도록 노력할 의무를 새로 부과했다. 이에 일본 최대 자동차 기업인 도요타는 지난 8월부터 65세까지 적용하던 퇴직 후 재고용을 70세까지로 확대하기로 했다. 근로자 뜻에 따라 60세에 정년퇴직한 후 최대 10년간 더 일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생산성 등을 고려해 임금 수준은 퇴직 당시 대비 5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30대 기업을 중심으로 정년 연장 대비 TF(특별팀)를 꾸리는 모습도 감지된다. 현대차·기아 등이 최근 정년 연장 TF를 꾸렸다. 이들 TF는 시니어 근로자들이 지속해서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재교육 방안을 모색하고, 정년 연장 등에 따른 인사·승진 제도 개편을 논의할 것으로 예측된다. 생산성이 크게 떨어진 시니어 근로자 임금을 재조정하거나 다시 의욕을 불어넣을 방안도 연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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