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삔도리'를 찾는 아파트 경비실 경리 직원('플란다스의 개'), 터널에 갇힌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터널'), 부당한 일을 겪은 소녀의 발자취를 따르는 형사('다음 소희'), 인간의 마음이 생겨버린 인형('공기인형'), 좀비 사태 속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의녀('킹덤')까지. 아주 현실적이거나, 판타지적인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러하다. 배두나가 연기한 인물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을 것만 같다.
"제가 추구하는 연기가 그래요. '현실에 있을 것 같다'는 느낌만 주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연기는 결국 (보는 사람의) 취향이라서 각자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하거든요. 제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연기를 잘하는 게 목표가 아니고요. 저는 그 인물이 진짜 그 사람처럼, 그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길 바라요. 그게 설령 인형이나 클론이라고 하더라도요."
쿠팡플레이 시리즈 '가족계획'(감독 김선 김곡)에서도 그러하다. 기억을 자유자재로 편집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엄마 영수가 가족들과 합심하여 악당들에게 지옥을 선사하는 이야기 속 배두나는 영수의 특별한 능력보다 현실에 발붙인 면면들을 살폈다.
"영화 '브로커' '다음 소희'가 결정타였던 것 같아요. 저는 항상 (캐릭터성 짙은 인물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레벨문'을 찍긴 했지만 그건 어디에도 없는 경계선상에 선 느낌이고 제 갈증을 풀어줄 수는 없었어요. 영화 '린다린다린다' '플란다스의 개' 같은 경우 사회 이슈를 발랄하게 풀어가잖아요? 제가 그런 작품을 좋아하거든요. '가족계획'도 그런 면에서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영수'는 겉으로 드러내는 감정의 폭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배두나는 '가족계획'과 '영수'에게 겁도 없이 덤볐던 것 같다며 웃었다.
"캐릭터를 보며 '연기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안 됐어요. 전작들이 워낙…하하. 면역이 생긴다고 할까? '공기인형'으로 인형 역도 해보고, '코리아'로 왼손잡이 탁구선수도 해봤잖아요. 할 때마다 너무 괴롭고 어려웠는데 다음 작품을 선택할 때는 도움이 돼요. '나 인형 역할도 해봤는데', '왼손으로 탁구도 쳐봤는데 이거 하나 못할까?' 하는 식이죠. 맷집이 늘어요. 하하."
배두나는 평소에도 감정을 얼굴로 드러내는 연기는 지양하는 편이지만 '영수'는 평소보다 더 감정 표현에 까다로웠다고 설명했다.
"'영수'가 더욱 힘들었던 건 감정 표현을 더욱 눌러야 했기 때문이에요. 평소에도 표정으로 감정을 다 드러내는 건 지양하는 편이거든요. 100%의 감정을 70%까지 누르고 30% 남짓한 것으로 드러내 왔다면 이번 감정은 '나머지' 감정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게 핵심이었죠. '제로'의 상태. 어떤 감정도 삐져나와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어릴 때부터 동정심도 없는 '기질'을 가진 아이들을 뽑아서 사람을 고문하고 도려내는 것들을 가르쳐왔으니까. '텅 빈' 모습을 연기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조금도 삐져나온 것이 없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거든요. 어려웠어요."
'제로'의 상태. 텅 비어 있는 '영수'지만, 아이들에게만큼은 남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는 '엄마'로서의 역할에 집착한다.
"그 점이 참 어렵더라고요. 하하. 아이들에게 느끼는 이 감정은 뭘까. '영수'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아이예요. '사랑을 글로 배운' 타입이죠. 다정한 엄마가 되고 싶은데 그 '다정한 엄마'라는 걸 몰라요. 본 적이 없으니까. '모범 답안'을 찾아서 모성애를 익히고 아이들에게 연습하고 있어요. '영수'가 아는 건 고문하는 일뿐이에요. 그런 점들이 드러날 수 있도록 '영수'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전사를 담아놓았어요."
배두나가 말하는 '전사'에 관심이 쏠렸다. 그가 한 인물을 생동감 있게 표현할 수 있는 건 그 인물에게 역사를 부여하고 행동 하나하나를 섬세히 돌보았기 때문이었다. 배두나는 "저는 한 인물을 두고 소설 한 편을 써 내려간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 사람의 인생, 과거를 상상하는 작업을 거쳐요.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하려면 그 사람의 기억이 있어야만 하잖아요. 이 사람의 이야기를 하다가 폭발하려면 쌓아둔 걸 터트려야 하니까. 어떤 기억이나 감정을 '쌓는' 작업이 필요한 거죠. 캐릭터의 '진짜 감정'을 알아야만 해요."
'영수'의 삶은 드라마를 끝까지 본 뒤에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배두나는 '영수'의 전사가 설명되지는 않지만 8부까지 본 뒤에는 그가 '딥'하게 인물을 연구해야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고 귀띔했다.
"특수교육대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그렇게 영수의 전사가 설명되지는 않아요. 사실 영수의 엄마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엄마도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마치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처럼. 모계로 능력이 이어지는 거죠. 엄마가 영수의 기억을 지운 설정을 듣고 계속 생각했어요. 그 공허함과, 엄마에 대한 기억을요. 특히 지훈(로몬 분)이와 지우(이수현 분)를 대할 때 그 감정을 떠올린 거 같아요.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속내에는 딥한 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아마 회를 보시다 보면,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제가 딥하게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요."
배두나가 '영수'의 역사를 써 내려갈 때 가장 도움을 준 건 김정민 크리에이터다. 그는 누구보다 배두나의 고민을 잘 알았고 막힘없이 '힌트'를 내어주기도 했다.
"시나리오만 봐도 느껴지지만 (김정민 크리에이터는) 상상력을 풀어내는데 거침이 없어요. 거침없이 밀고 나가니까 보는 이도 '말이 되네' 싶고요. 제가 고민했던 건 '영수'가 '브레인 해킹'을 할 때 눈물을 흘리는데 그건 슬픔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게 기술적으로 저 아래 어떤 걸 건드리고 발현되는 과정이라고 보았거든요. '브레인 해킹'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어떤 걸 건드리는 걸까? 거기에 의문을 품었는데 (크리에이터가) 연관 지을 수 있는 키워드를 던져주었고 그걸 힌트 삼아서 연기할 수 있었어요. ('브레인 해킹'과 눈물에 관한 힌트는 시청자를 위해 비밀로 하겠다고 한다.)"
배두나는 '브레인 해킹' 장면을 찍으면서 너무나 큰 고통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영수'와 달리, 연기자 배두나는 그 잔혹한 상황에 큰 고통을 느껴왔다.
"멘탈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통쾌하다' '재밌다'고 느꼈는데요. '브레인 해킹'을 하는 과정이 너무 잔혹하더라고요. 피도 너무 많이 나오고. 거의 회마다 브레인 해킹을 하는데 상대는 가장 모멸감을 느낄만한 속옷 차림이고, 저의 행동에 육체적 고통을 느끼고, 피가 쏟아지고…. 정말 괴로웠어요."
그럴 때마다 아빠 '철희' 역을 맡은 류승범이 그를 달랬다고. 배두나는 "정말 큰 의지가 되었다"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보시다시피 호흡 너무 잘 맞았고요. 저는 사실 그 분이 현장에 안 계셨으면 멘탈 브레이크가 올 수도 있었어요. 쉬운 작품이 아니었어요. 그분이 좋은 에너지를 주셨고요. 경력이 25년이 넘어가면, 타성에 젖을 수도 있는데 정말 맑은 영혼의 소유자세요. 그래서 '철희'로 있을 때도 정말 많이 의지했지만, '류승범'이라는 배우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됐고요. 정말 최고예요. 앞서 공개된 '무빙'으로 액션도 잘한다는 인식이 각인돼 있지만, '가족계획'에서도 엄청나거든요. 5, 6분쯤 철희의 순애보가 나옵니다. 저는 울면 안 되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너무 훌륭한 배우시고,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연기적으로도요."
'가족계획'이 만드는 기묘한 유머도 배우들의 호흡으로 만들어졌다고. 극 중 인물들이 엇박자로 만들어내는 코미디와 유머는 연습 없이 그야말로 현장에서 만들어졌다는 부연이었다.
"배우라는 직업이 좋은 이유가 그것 같아요. 현장에서 연기할 때, 모두 한마음이 되거든요. 사람이 그러기가 힘들잖아요. 그런데 현장에서는 '이 장면 재미있게 만들자'라는 한 마음으로 경쟁이 없어요. 서로 상부상조할 수밖에 없어요. 이 사람이 좋은 호흡을 던져주면, 저도 더 좋아져요. 그래서 항상 도움을 받아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요. 그래야 더 좋은 장면이 나오니까요. 특히 영수는 아주 무표정하고, 반응이 없는 캐릭터라서 상대 배우가 힘들 수 있거든요. 리액션이 있어야 핑퐁이 되는데, 영수의 적막을 다 상대 배우들이 감당해 주잖아요. 그래서 영수를 만들어준 게 가족들인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배두나는 '가족계획'으로 올해를 채운 뒤 차기작은 "조금 더 여유롭게 천천히" 정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지난 10년가량 바쁘게 보냈던 것 같아요. 다작하기도 했고요. 다음부터는 조금 더 천천히 해보려고 해요. 작품을 피하려는 건 아니고요. 예전보다 확, 제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의 등장이 드물어진 거 같아요. 업계 상황도 그러하고요. 저는 문체든, 소재든, 주제든 한 번 반 하면 5분 만에도 하겠다고 결정하는 사람이니까요. 이렇게 말해놓고, 언제든 '바로' 결정해서 돌아올 수도 있겠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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