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은 '돈스쿨'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제가 겪은 로스쿨은 그렇지 않았어요. 정말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게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열어두고 있습니다. 로스쿨 제도가 없었다면 저는 감히 변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조차 못 했을 겁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박병철 변호사(49·변호사시험 6회)는 22일 아주경제 인터뷰에서 "로스쿨 제도는 사법시험과 달리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을 위해 활짝 문이 열려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취약계층 학생들을 상대로 멘토링을 했는데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법조인을 꿈꾸는 학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며 "하지만 로스쿨은 학비는 물론 생활비도 제공하고 있어 법조인이 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다. 학생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꿈을 접지 않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박 변호사가 이렇게 조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른바 '개천의 용'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적 부산의 판자집이 즐비한 빈민촌에서 나고 자랐다. 중학생 때는 학교가 끝나면 연탄 배달을 하며 생계에 보태고,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일찍이 구미공단에 취업해 '소년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1990년대 말 '벤처 붐'에 휩쓸려 사업자금도 없이 무작정 상경하게 됐다.
상경 후 신용보증기금에서 창업자금을 빌린 그는 사무실을 구해 3만~4만원짜리 책상을 몇 개 놓고 직원을 구해 무작정 사업을 시작했다. '벤처 붐'이라는 사회 분위기 덕분에 투자자들이 줄을 섰고 2년간 박 변호사는 '성공한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벤처 붐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투자자에게 회사를 뺏긴 뒤 빈 손으로 내쫓겼다. 그에게 다시 암흑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다 그는 돌연 중국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박 변호사는 "그때도 무모했다. 중국말도 모르고 중국에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일단 중국에 가서 소규모 자본으로 중국 내 여러 곳을 다니며 상품을 만들어 국내에 팔면서 사업을 키워나갔다"고 설명했다.
순탄하던 유통업도 약 5년 만에 파산의 길을 걷게 됐다. 한순간에 박 변호사는 기초수급자가 됐다고 했다. 한참을 방황하던 그에게 지인이 로스쿨 진학을 추천했다. '투자로 치면 이것만큼 확실한 투자가 있겠나' 하는 생각에 박 변호사는 이번에도 무작정 로스쿨 시험을 쳤고, 3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로스쿨에 진학했다.
박 변호사는 로스쿨에서 공부하면서 변호사가 되면 가장 낮은 곳에서 어려운 분들을 돕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사업을 할 당시 판촉물로 사용할 물건을 수입했는데 수입대행사에서 실수로 원산지표시를 누락해서 벌금이 나왔다"며 "면책사유가 있었는데도 전과가 생긴 게 너무 억울했다. 많은 저소득층의 분들이 그러할 것이라 생각해서 그분들을 돕고 싶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로스쿨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로스쿨 3년을 '버텼다'고 회상했다. 박 변호사는 "당시 기초수급자로 월 52만원을 받아 4명의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던 때였다"며 "학비는 면제가 됐지만 책을 살 돈이 없어 버린 책을 주워 공부하며 힘겹게 학업을 이어나갔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는 기숙사를 구할 엄두도 내지 못해 강의실에서 의자를 붙여 쪽잠을 자곤 했다"며 "다른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에 일어나 씻어야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빨리 일어나고 누구보다 늦은 시간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어려웠던 시절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박 변호사는 '무모함'을 꼽았다. 그는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면 뭔가를 계획해서 했던 것은 아니고 '일단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뭐라도 해본 것 같다"며 "가능성에 대해 계산기를 두드려봤으면 아무 것도 도전하지 못했을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여전히 '무모한 변호사'인 것 같다. 어려웠던 환경 때문인지 특히 청년변호사들이 겪는 어려움이 크게 공감되는 것 같다"며 "청년변호사들에게 도움이 되는 무모한 일들을 해내고 싶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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