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법절차를 철저하게 위배한 계엄령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2018년)의 저자인 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 교수는 삼권분립과 같은 규범이나 제도만으로 불충분하기 때문에 “가드 레일의 존중”과 대통령의 권력사용에 있어서 절제를 강조한다. 특히 저자는 민주주의의 규범(democratic norm)을 강조한다. 즉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과 이해(understanding),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tolerance)가 민주주의의 기반임을 강조한 바 있다. 레비츠키 교수는 조선일보(2024.12.20.)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비상계엄 사태는 정치 양극화의 파괴적 결과로서 만약 비상계엄이 성공하였더라면 한국은 민주주의가 무너진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될 뻔했다고 술회한다. 다행히 한국 민주주의는 견고한 야당과 시민사회 덕분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진단한다. 그럼에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되기 전이나 후에 한결같이 한국은 부자(money machine)라고 비아냥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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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0대 경제대국인 대한민국에서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 빈발하는 친위 쿠데타(coup d’État)가 발생하였다는 점은 전 세계적인 충격파를 던져준다. 더구나 군인이 아닌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발령한 비상계엄령이다. 비록 실패한 계엄이지만 선진국 반열에 오른 국가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라 쿠데타의 말뜻 그대로 “국가에 대한 충격”은 오래도록 여진을 남길 것 같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번 계엄은 전 세계적으로 정치학자와 헌법학자들의 풍부한 연구 소재(objet)를 제공할 것이다. 미국, 프랑스 등 정치선진국뿐만 아니라 OECD 국가에서조차도 대통령 탄핵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번에 실패한 비상계엄은 87년 체제에서 세 번째 탄핵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불안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린 1980년 ‘서울의 봄’에 이은 2024년 12월 3일 ‘서울의 밤’은 대한민국 호에 대한 충격 그 자체다. ‘서울의 봄’은 비극적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서울의 밤’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새로운 이정표를 보여준다. 외신은 계엄 이후 정국을 K-드라마와 같다고 한다. 유혈 아닌 무혈 반혁명이다. 남녀노소 연령을 불문하고 동참한다. 운동권 가요 대신 K-팝을 열창한다. 해외교민들도 여의도 카페에 ‘선결제’한다. 여의도와 광화문에서의 시위 행태가 축제를 방불케 한다. 역설적으로 계엄 과정에서 성숙한 민주시민이 한국 민주주의를 축복하고 확인한다. 이제 그날의 밤을 다시 한번 재구성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가져보자.
몇 달 전 야당에서 비상계엄 논의를 제기했지만, 계엄 주관부서인 국방부장관은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의 말을 의심하는 민주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길게는 1년 짧게는 수개월 동안 김용현과 일단의 군인들이 비상계엄을 모의하고, 비상계엄령 발동 며칠 전에도 다수의 인사들이 이를 공유한 듯하다. 당일의 상황은 더욱 안타깝게 한다. 핵심모의자인 국방부장관을 비롯해서 수도방위사령관·정보사령관·방첩사령관 등 군 핵심요직들이 길게는 몇 달 전 짧게는 며칠 전부터 계엄을 숙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민간인 신분인 전 정보사령관이 계엄의 실질적인 설계자로 알려진다. 아무리 상명하복 관계인 군인이라 하더라도 민주법치국가의 기본틀에 대한 최소한의 숙고도 없었다. 계엄 당일에도 몇 시간 전부터 다수의 인사들이 인지한 듯한 정황이 보인다. 출장 중이던 행정안전부장관은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상경하였다. 경찰청장·서울경찰청장도 사전통고를 받았다. 이렇게 다수의 군·경 최고위층 인사들이 계엄을 숙지하였음에도 불행한 사태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공익제보자 즉 ‘워치독’(watchdog)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위 공직자의 실종된 민주시민의식을 질책하지 않을 수 없다. 차제에 공직자에게는 민주시민교육부터 최우선적으로 실시해야겠다.
당일 현장의 상황은 더욱더 국민적 분노를 자아낸다. 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이 속속 용산 대통령실에 집결하였다. 행정안전부장관의 국회 증언에 의하면 “국무위원 중 한두 명이 계엄에 반대의견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외교부 장관은 국회에서 대통령이 “오죽하면 내가 이런 결정을 했겠느냐”라는 상황에서 그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진술한다. 목숨 걸고 대통령에게 읍소하거나 바짓가랑이를 잡아채는 국무위원은 아무도 없었다.
이 지점에서 책임있는 공직자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더 반추하게 한다. 공직자는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1909년 민족의 원수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는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선조들이 쌓아올린 표상들은 오늘의 공직자들에게 살아있는 교본이다. “짐이 곧 국가”인 조선시대에도 국왕의 잘못에 대하여는 신하들의 충언과 진언이 끊이지 않았다. 삼정승, 사간원, 사헌부의 당상관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방유생들까지 상소로 임금의 잘못을 탄핵하였다. 정권을 찬탈한 임금에 대해서는 목숨 바쳐 저항하였다. 고려왕조를 끝까지 수호한 정몽주는 ‘선죽교의 피’가 되었다. 두문동 72현은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씨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라면서 만수산에 들어가 은둔으로 삶을 마감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불사이군(不事二君) 생육신·사육신은 후세에 길이 남을 절개를 보여준다.
권력은 책임을 동반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언제든지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1982년 경남 의령군 파출소 순경이 총기를 난사하여 62명의 무고한 주민이 희생되었다. 지방 미관말직이 저지른 일탈인데도 치안본부장(지금의 경찰청장)이 아니라 최상급자인 서정화 내무부장관(지금의 행정안전부장관)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진퇴를 분명히 한 책임 있는 공직자의 귀감이다. 서 장관은 15년이 지난 1997년 다시 내무부장관에 복귀했다. 사즉생(死卽生)의 본보기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사고가 발생해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태원참사로 꽃다운 청춘들이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는데 경찰청장이나 행정안전부장관이 책임지고 사퇴한 일이 없다. 지금 경찰청장과 행정안전부장관은 계엄에 연루된 형사피고인·피의자 신분이다.
국회에서 한덕수 총리는 당일 국무회의는 중대한 “형식적·실체적 흠결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 그날 국무회의는 어느 누구도 규정에 따라 소집한 흔적이 없다. 그나마 국무회의를 개최하여야 한다는 형식적 요청에 따라 회의 정족수 채우기에 급급했다. 국무회의가 정식으로 소집되지도 않았으니 국무회의 회의록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가 없다. 회의 장소도 국무회의실이 아니라 대통령 접견실이었다. 대통령령인 ‘국무회의 규정’에 따른 의안 제출(제2조), 차관회의를 거친 의안 심의(제4조), 구성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개의하고 구성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제6조), 간사의 국무회의록 작성(제11조) 등을 총체적으로 위반하였다.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써 하며, 이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한다. 군사에 관한 것도 또한 같다”(헌법 제82조). “5. 대통령의 긴급명령·긴급재정경제처분 및 명령 또는 계엄과 그 해제. 6. 군사에 관한 중요사항”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헌법 제89조). 필수적 심의사항이다. “국방부장관 또는 행정안전부장관은” “사유가 발생한 경우에는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에게 계엄의 선포를 건의할 수 있다”(계엄법 제2조 제6항).
12월 3일과 4일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과정에 대하여 헌법적으로 평가한다면 국무회의의 소집, 심의안건 상정, 심의가 제대로 된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절차상 위헌이다. 국무회의는 의결기관이 아니고 심의기관이라는 헌법상 법적 성격으로 인하여 국무회의 심의를 거쳤다는 외피를 갖추었다고 강변한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잘 드러나는 바와 같이 1979년 12·12 쿠데타에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일단의 무장군인들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계엄사령관 체포동의서를 받기 위해 밤새 애쓴 흔적보다 못한 상황이다.
또한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에는 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副署)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계엄령 발령이라는 국법상 행위에 대하여 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하였다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文書)로써 하여야 하는데 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가 문서로써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부서는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에 대하여 관계자들의 책임소재를 명확히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부서 없는 행위는 위헌·무효이다.
“계엄을 선포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헌법 제77조 제4항). 하지만 대통령이 국회에 계엄선포를 통고한 흔적이 없다. 그런데도 국회는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하였다.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헌법 제77조 제5항). 그나마 대통령이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에 따라 계엄을 해제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국민적 요구에 대통령이 굴복함으로써 위헌상태는 최단시간에 그쳤다.
‘서울의 밤’은 국가긴급권 발동의 실체적 정당성 이전에 헌법과 법률에서 요구하는 적법절차(due process of law)를 총체적으로 위배하였다. 민주법치국가에서는 형식적 적법절차 즉 헌법과 법률이 마련한 일련의 법적 절차를 지켜야 한다. 적법절차는 외관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동시에 요구된다. 하지만 비상계엄령이 실질적 정당성을 갖추었느냐 여부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외관부터 위헌·위법인 절차는 법질서를 원천적으로 파괴한 행위이다.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최소한 정의의 외피만이라도 갖추었어야 한다. 법치국가가 건전하게 작동하려면 적어도 형식이 실질을 우선적으로 담보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형식적 정의의 외피도 갖추지 못한 곳에 실질적 정의는 애당초 터 잡기가 불가능하다.
필자 주요 이력
▷파리2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한국공법학회 회장(2005~2007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2009년 1월~2012년 12월)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2010~2013년) ▷동아시아연구중심대학협의회 의장 ▷제26대 서울대 총장(2014년 7월~2018년 7월)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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