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외신기자로 한국의 상황을 해외 독자들에게 보도했던 필자로서 최근의 한국은 그때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정치, 경제, 사회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터지는 위기 상황이 그때와 비슷하다는 얘기다. 계엄으로 촉발된 윤 석열 대통령의 탄핵 사태는 그 당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전직 대통령들이 부패와 내란 혐의로 구속되는 상황을 연상케 한다. 경제가 침체하는 속에서 주가가 바닥을 치고 원화가 추락하는 지금은 90년대 말 외환위기 와중에 IMF 긴급 자금으로 국가 부도 사태를 가까스로 면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거기다가 지난주 무안공항에서의 비행기 충돌 참사는 삼풍백화점 및 성수대교 붕괴 등 각종 사고로 얼룩졌던 그 시절과 비교될 수도 있다.
이렇게 계속되는 위기 와중에 맞는 새해는 모두에게 우울하게 다가온다. 희망과 기쁨보다는 분노와 절망이 앞선다. 새해 덕담을 나누기보다는 장래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앞선다. 깊은 상처에 신음하는 한국인의 마음을 달래줄 그 어떤 즐거운 뉴스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위안이 되던 한국 문화의 인기도 주춤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있었지만 기대를 모았던 TV 드라마 오징어게임 2편은 생각만큼의 성공은 아니었다. 한국의 스포츠 영웅으로 불리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손흥민 선수도 최근에는 부진한 모습이라 씁쓸하다.
요즘의 이러한 상황은 한국인이 90년 중 후반에 느꼈던 절망감과 무력감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어찌 보면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에 과연 한국이 다시 도약하기 어려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게 된다. 2차 대전 초기 나치 독일의 침공이 임박한 와중에 윈스턴 처칠 총리는 영국이 “가장 어두운 시간 (the Darkest Hour)”을 보내고 있다고 한탄한 적이 있다. 오늘의 한국도 그런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까지도 현대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변화를 이뤄낸 나라 중 하나라고 평가되던 한국에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한 세대 만에 찬란한 경제 성장과 정치 발전을 성취한 모범 국가 한국에 과연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공교롭게도 20여 년 전 한국이 비슷한 위기 상황을 겪고 있을 때 국내외 많은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이다. 90년대 중반까지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던 한국이 90년대 말 한순간에 추락하면서 많은 전문가들이 가졌던 궁금증이다.
필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이유가 한국인의 너무 성급한 자만심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외신은 앞다투어 한국이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렸다”고 분석한 바 있다. 갑작스런 성공에 도취되어 한국인 특유의 도전 정신을 상실했고 변화에 대한 열망을 포기했다고 평가했다. 최근의 상황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세계의 모범이 되었고 경제는 탄탄대로이며 문화는 세계 최고 수준이 되었다는 자만감일 것이다. 그로 인해 현실에 만족하고 더 이상의 변화를 거부한 것이 오늘날 한국 위기의 배경이 아닌가 한다.
정치적으로 보면 87년 민주화 투쟁을 통해 확립된 정치 제도를 시대가 변한 지금까지 그대로 고수해온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대통령 장기 집권을 막기 위해 마련된 단임제는 갈수록 많은 부작용을 노출하고 있어 개헌을 통해 중임제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또 현재의 헌법과 법 체계가 제왕적 대통령을 유도한다는 우려 속에서 개헌을 통해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승자 독식을 야기하는 현재의 국회의원 소선거구제가 분열과 대립의 원인이라는 점 때문에 중선거구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위한 주장들은 지난 30~40년간 한국의 정치 환경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존 정치권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하며 기득권을 고수하고 있다. 양대 정당은 자신들에게 손해가 될 만한 어떠한 변화도 거부한다. 제왕적 대통령을 막기 위한 권력 분산에 대해서도 야당일 때는 강력하게 주장하다가도 막상 여당이 되어 권력을 잡으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뒷전으로 밀어 버린다. 그 와중에 정치권의 갈등과 분열은 심화되고 결국은 작금의 정치 위기를 초래했다.
이렇게 자만심에 취해 변화를 거부하기를 계속한다면 한국의 위기는 계속될 것이다. 선진 국가에 진입하기는커녕 현재의 위치를 지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처칠 총리의 말대로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지금은 한국에 어둠이 닥쳐 있지만 어쩌면 밝아오는 여명의 전조일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위한 조건은 분명하고 그것은 변화를 두려워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새해를 맞아 우리 모두가 필히 되새겨 봐야 할 대목이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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