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점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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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재 부장
입력 2025-01-0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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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재 정치사회부장
문영재 정치사회부장
"나는 내년 1월 1일이 오기 전까지 살기 어려울 것 같다. 만일 내가 내 형제와도 같은 러시아 국민 손에 죽는다면 황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다. 왕조는 앞으로도 수백 년 더 지속할 테니까. 그러나 내가 만일 귀족 손에 죽는다면 그들(러시아 귀족)은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리라. 만일 당신(러시아 황제) 일족 중 누구라도 내 죽음에 연루된다면 2년 내 당신 일족·가족과 자식까지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러시아 민중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다."

제정 러시아 말기 괴승으로 불린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죽기 직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쓴 편지 중 일부분이다.

러스푸틴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를 등에 업고 당시 '비선 실세'로 군림했다. 니콜라스는 헝가리 마술사 해리 후디니를 숭배할 정도로 비합리적인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황태자 알렉세이가 혈우병으로 고생하자 1907년 니콜라스는 라스푸틴을 황궁으로 불러들인다. 라스푸틴이 실제로 황태자 병을 고치자 니콜라스와 황후 알렉산드라는 그를 총애하고 국정에 깊숙이 관여토록 했다.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이 하는 일은 모두 성스럽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러시아 황족과 라스푸틴의 잘못된 만남은 결국 망국을 자초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라스푸틴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러시아군이 남부 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우면 승리한다고 알렉산드라에게 전했고 니콜라스는 장군, 참모들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말을 추종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러시아는 대패했고 서부 공업지대와 우크라이나까지 모조리 독일군에게 헌납한다. 당연히 재정 러시아는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은 1948년 흐레이트 호프만스라는 무당을 불러들여 왕실을 위기로 내몰기도 했다.

어리석은 지도자가 미신 또는 무당에 휘둘려 나라를 위기로 몰아간 사례는 나라 밖에만 있는 건 아니다. 고려 말 공민왕은 요승 신돈에게 전권을 맡겨 국정농단을 초래하고 왕조 멸망을 재촉했다.

구한말 임오군란 등으로 위기에 몰린 명성황후는 여자 무당을 데려와 '진령군'이라는 군호까지 하사한다. 7종 천민인 무당에게 군호를 내린 것은 조선왕조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진령군은 황실 비호를 받으며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목숨을 잃을 때까지 무려 12년간 국정을 농단하고 나라 곳간을 탕진해 버렸다.

인공지능(AI)이 우리 일상을 바꾸고 우주비행선이 달에 착륙하는 최근에도 '점술정치' 사실이 밝혀져 국민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12·3 비상계엄 기획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은 ‘안산보살’로 알려졌다. 노씨는 또 계엄 전 수십 차례에 걸쳐 전북 군산 한 무속인을 찾아 군 관계자들 사주와 점을 본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공천 등과 관련해 명태균씨는 영적인 대화를 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매국노 고종' 저자인 박종인은 "국가지도자나 그 가족이 무속에 매달리면 어떻게 되는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니콜라스, 공민왕, 명성황후 사례에서 무엇을 배운 건가"라며 개탄하기도 했다.

2025년 을사년 벽두,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안 가결,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추락 참사 등 국가 위기에 자신의 길흉화복을 엿보려는 사람들로 점집마다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소식이 넘쳐난다.

선량한 필부필부가 사적인 관심으로 신년 운세나 사주를 보는 것과 달리 정·관계 인사가 공적 의사 결정에 이를 활용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 자칫 국가 운명을 위기에 빠뜨리고 국가시스템마저 망가뜨릴 가능성이 크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정치와 미신은 이제 떨어질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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