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Future] '글로벌 원전 르네상스' 한국이 맨 앞에 서려면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곽재원 논설위원장
입력 2025-01-15 06:0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곽재원 논설위원장
[곽재원 논설위원장]


지난 10일 원자력계 신년회에는 산학연 관계자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국회의원과 정부부처 장차관도 나와 격려했다. 황주호 한국원자력산업협회장(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의 신년사에 참석자들은 뿌듯해하는 모습이었다. 황 회장의 신년사는 오는 3월 체코 원전 최종 계약을 앞둔 시점이라 한층 묵직하게 다가왔다.

“지난해 국내 원자력계는 원전을 안전하게 운영하며 미래 성장 기반을 다졌습니다. 2015년 이후 최고의 원전 이용률인 83.8%를 달성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에 이바지했습니다. 신한울 1·2호기를 종합 준공하고 신한울 3·4호기를 착공해 원전생태계에 소중한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체코 신규 원전 건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고, 1조2000억원 규모인 루마니아 원전 설비 개선 사업을 수주해 본격적인 해외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아울러 i-SMR(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사업 추진과 SMR 스마트 넷제로 시티 마케팅 등 미래 원자력 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원자력계를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직접 원자력 정책에 관여해 보기도 한 필자도 신년회에 참석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필자의 머리속에 문득 2개의 장면이 떠올랐다.
 
# 13대 국회(1988~1992)가 1988년 10월 정기국회에서 16년 만에 국정감사를 실시했다. 과학기술처와 관련 기관 국감은 국회 경제과학기술위원회가 담당했다. 당시 여소야대 정국에서 제1야당은 김대중 총재 휘하의 평민당이었다. 김대중 당수가 경과위 소속으로 국감에 출격하게 되니 매체들이 대거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첫 번째 국감 장소는 대덕연구단지였다. 이때 김대중 당수가 맨 먼저 들른 곳이 원자력연구소였다. 김 총재와 당시 한필순 소장은 차담회를 했다. 기자들과 일부 국회의원들은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필자는 김 총재 바로 뒤에서 취재수첩을 들고 있었다.

“한 소장님, 미국의 오펜하이머를 잘 아시지요. 나는 우리나라도 엄청난 기술을 갖게 됐다고 봅니다.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잘 이용하고 산업 발전에 기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원자력연구소가 그 사명을 갖고 연구개발을 잘해주시길 기대합니다.”(당시 오펜하이머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김대중 총재는 그로부터 10년 뒤 제15대 대통령에 올라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과 IT강국 건설에 큰 업적을 남겼다.
 
# 제17대 이명박 대통령(2008~2013)은 임기 첫해 녹색성장위원회를 만들어 한국을 세계에서 모범이 되는 ‘그린 뉴딜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필자는 녹색성장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에 임명됐다.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고 대통령과 차담회를 하는 자리였다.

“원자력(발전)은 국제외교와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나는 원전외교를 잘 압니다(이 대통령은 현대건설 대표로서 고리1호기부터 원전 건설을 주도했으며. 원자력산업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나 프랑스의 아레바 같은 원자력 기업들과도 인맥이 있습니다. 앞으로 원전외교를 위해 나도 앞장서서 뛸 테니 안전위 위원들은 원전이 안전하게 건설되고 가동되는지를 잘 살펴보십시오. 특히 미디어 출신 위원은 국민과 소통하고 설득하는 데 적극 노력해 주길 바랍니다.”

이때 원자력은 녹색성장기본법에 들어가 클린에너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주를 통해 한국을 원전 수출국으로 나아가는 데 큰 업적을 남겼고, 15년 뒤 체코 원전 건설을 수주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2016년 창립 60주년을 맞아 60년간 가장 괄목할 만한 원자력 기술 발전과 성공한 원전사업 그리고 IAEA 지원 활동을 사진 60장으로 정리해 홈페이지에 올렸다. IAEA는 한국이 건설한 UAE 바라카원전을 역사상 처음으로 계약된 공사기간 내에 공사를 완료하고 계획된 공사예산 범위 내에서 공사를 마친(On time On budget) 성공사례로 실었다.

각기 다른 시기의 이 두 장면을 떠올리며 원자력은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지식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를 갖춘 국가 지도자의 결단에서 자라난다는 사실을 다시금 절감했다. ‘원자력은 국가다’라는 구호는 허울이 아니라 적확한 표현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데이터센터 건설을 견인차로 다시 불고 있는 세계의 원전 르네상스를 살펴보자. 많은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원전에 눈을 돌리고 있다.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의 기억이 남아 있는 일본도 이제 원전을 '탈탄소 전원'으로 재평가하고 있다. 미국의 테크 대기업들은 인공지능(AI)용 데이터센터의 대량소비 전력을 충당하기 위한 수단으로 원전을 주목하고 있다.

구글은 작년 10월 14일 차세대 원자로 '소형모듈원자로(SMR)'를 개발하는 미국 카이로스 파워(캘리포니아주)와 SMR로 생산한 전력을 조달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030년까지 첫 번째 SMR을 가동하고 2035년까지 SMR 여러 개를 추가할 계획이다. 총 발전 용량은 500메가와트(50만킬로와트)로 대형 원전 0.5기 규모 정도가 될 전망이다.

구글이 직접 나서서 고객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SMR 개발과 보급을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구글은 “태양광 발전에 대한 추가 투자를 검토하고 있으며, SMR과 같은 신기술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데이터센터, AI, 암호화폐(가상화폐)로 인한 전력 수요는 2022년에서 2026년까지 2.3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원전은 테크 대기업이 보유한 데이터센터에 가장 적합한 전원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24시간 가동되는 데이터센터는 발전량 변동성이 큰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에 비해 원전의 안정성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원전이 탈탄소 전원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이다.

테크 대기업들은 탈탄소 목표를 세우고 재생에너지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예컨대 구글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실질적으로 제로(net zero)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수립했다. 안정적인 가동이 가능하고 탈탄소 전력을 생산하는 원전은 테크 대기업에 기대되는 전원인 셈이다.

AI용 데이터센터로 전력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 속에서 미국 발전업계에 M&A(인수합병)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있다. 기존 발전소를 보유한 타사를 인수하는 것이 많은 시간과 투자가 필요한 신규 발전소 건설보다 쉽기 때문이다. 텍사스주 휴스턴에 본사를 둔 미국 최대 원전 운영회사인 콘스탈레이션 에너지는 한국 원자력계 신년회가 열린 10일 천연가스 화력발전업체인 칼파인을 164억 달러(약 2조60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전력회사로는 최대 규모의 M&A다. 동종 업계 M&A를 통해 발전 능력을 확대하기 위한 포석이다. 두 회사가 합병된 후 발전 용량은 약 6000만㎾(대형 원전 60기 정도)에 이를 전망이다. 콘스탈레이션은 약 3240만㎾의 발전 용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60%가 원전이다.

이런 세계 원전 르네상스 추세 속에서 한국수력원자력은 올해 원전 안전성 강화, 원전 수출 최종 계약 달성, 차세대 원자력 기술력 확보, 원자력계 현안 해결과 제도 개선, 탄소중립 사회 실현 등 5가지 주요 사업 목표를 내걸고, 세부 실행 지침과 함께 SMR 사업 등 중장기 로드맵도 그리고 있다. 원전의 미래 성장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계속운전, 인허가 등이다. 이는 한수원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정치와 행정이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은 세계 원자력 산업에서 중요한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원자력 수출도 마찬가지로 한수원 혼자서 할 수 없다. 원전은 기술과 상품을 파는 사업이 아니라 ‘국가의 신뢰’를 파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신뢰는 국내 환경이 부실하면 생겨날 수 없다. ‘원팀 코리아’가 필요한 이유다.

AI는 원전 수출에서 글로벌 경쟁국으로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요 전략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첫째, 전략적 파트너십 활용이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서로의 강점을 결합해 국제 프로젝트 확보 가능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미국의 원천 원자력 기술에 접근하는 동시에 제조 기술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로써 세계 원전시장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에 대응할 수 있다. 둘째, 기술 혁신에 집중해야 한다. 첨단 원자로 설계, 특히 SMR 개발에 적극 투자해야 한다. 맞춤형 원자력 솔루션 제공을 통해 AI 데이터 센터의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한다. 셋째, 국내 원자력 생태계를 강화하는 일이다. 원전산업 지원을 위한 대규모 펀드를 조성하고, 산학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2030년까지 국내 에너지믹스에서 원자력 비중을 최소 30%로 유지해 원전산업의 견고한 국내 기반을 확보하고, 글로벌 아웃리치를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

한국이 더 큰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 원전 건설에서부터 해체와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이르기까지 원전산업의 다양한 측면에서 전문성을 개발해야 한다. 금융, 교육 및 장기 지원을 포함한 포괄적인 솔루션을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전략에 집중함으로써 한국은 기술 전문성, 전략적 파트너십, 안전과 혁신 강화를 통해 세계 원전시장에서 강력한 경쟁자로서 입지를 강화할 수 있다.
 
최근 국내에서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관련해 에너지 문제가 주요 이슈로 떠오르면서 문재인 정부 때 탈원전 정책을 추진한 더블어민주당이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을 위해서는 에너지정책의 탈정치화와 일관성이 매우 중요하며, 원전과 신재생에너지 등 발전원별 균형 잡힌 에너지 믹스가 필요하다는 변화된 인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반도체와 AI 등 초전력 산업의 발전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발전원별 전력수급 상황과 발전원가 분석을 통해 실용적인 에너지정책 수립이 요구된다는 데에도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소식통에 따르면 민주당 경제상황점검단과 미래경제성장전략위원회가 16일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을 위한 에너지 믹스 대책 간담회’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향후 민주당이 ‘탈원전 정책’을 계속해 나갈지에 대한 입장이 정리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민주당은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고, 원전 재흥(再興) 정책을 당의 공식 입장으로 정해야 한다. 한국이 세계 원전 르네상스 대열에서 이탈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