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나는 아침 일찍 남편에게 담배를 사다 주기 위해 집을 나섰다.”
소설 <금지된 일기장> 주인공 코사티 발레리아(43)는 이름을 잃어버린 여성이다. 남편의 ‘아내’이자, 두 자녀의 ‘엄마’다. 한때 이름을 불러줬던 남편도 언젠가부터 그녀를 ‘엄마’라고 부른다.
발레리아는 늦가을 어느 일요일 아침, 남편의 담배를 사기 위해 찾은 담배 가게에서 우연히 눈에 들어온 새까만 표지의 평범한 공책을 산다. 소설 배경인 195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일요일에 담배 가게에서 담배 외 상품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 “금지된 일”이라며 판매를 꺼리는 주인을 한사코 설득해 공책을 손에 쥔 그녀는 어느 연유에서인지 가족들에게 공책을 숨기려 한다.
문제는 그녀가 집에서 자기만의 공간, 하물며 공책을 둘 서랍 하나가 없다는 점이다. 결국, 그녀는 ‘빨래 주머니’ 안에 공책을 두기로 한다. 발레리나가 집안에서 온전히 소유한 공간이 ‘빨래 주머니’뿐이란 점은 그녀가 걸어온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알바 데 세스페데스(1911~1997)가 <금지된 일기장>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 독자들과 만난다. 이탈리아 페미니즘 작가인 알바 데 세스페데스는 글을 통해 여성 혁명을 말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 속 여성의 삶과 고민은 현재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소설이 나온 지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성 독자들은 발레리아의 생각에 공감할 수 있다. 또한 그녀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상황이 현재와 무섭게 닮아 불편하기까지 하다.
발레리아는 6개월간 일기를 쓰면서 혼란에 빠진다.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당시 흔치 않았던 워킹맘으로 산 그녀는 지난 20년 동안 가족만을 위해 살았다. ‘아이들=나’라는 생각 하나로, 일도 집안일도 혼자 떠맡았다. 부유한 학창시절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직장에서도 마음을 터놓을 동료 하나 없다.
하물며 은행원인 남편의 연봉이 올라도 딸을 위한 코트 등을 살 생각 뿐, 선뜻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할 생각조차 못 한다. 발레리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녀 자신만이 아니다. 가족들도 그렇다.
하지만 일기를 쓰면서 발레리아는 각자만을 앞세우는 남편과 자녀들의 행동에서 '그럼 나는?'이란 생각을 갖게 된다. 자신의 모습,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하찮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태도에 불만을 갖게 된다.
종국엔 스스로가 “가정부만도 못하다”고 느낀다. 가정부는 가끔은 집에서 혼자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은 안락의자에 편히 앉아 생각을 정리할 시간조차 없다는 것이다. “가정부는 종일 쉬지 않고 일하지만, 저녁에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인사하고 나서는 자기 방이나 다락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 있다. 나도 다락방 정도면 충분한데.”
그러면서도, 진취적인 딸에게는 그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강요한다. 결혼해도 유명 변호사로 살길 꿈꾸는 딸에게 발레리아는 “남자를 존중해야 아이들과 가족을 사랑할 수 있는 거란다”라며 본인이 걸어온 삶의 길을 딸도 걷길 요구한다.
그러던 중 발레리아는 신혼여행 이후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베네치아에 갈 기회가 생긴다. 베네치아 여행과 가족 사이에서 갈등하는 발레리아의 모습은 불안하면서도 안쓰럽다.
작가는 발레리아의 딸 미렐라의 입을 빌려,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던지는듯하다.
“엄마는 여자가 집안일이나 요리하는 일 외에 다른 성취감을 느끼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여자의 의무는 가족을 돌보는 것뿐이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살지 않을래요. 그러기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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