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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순 칼럼] 한국 외교정책 '패러다임 전환'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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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
입력 2025-02-1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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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 대한민국 새판짜기] ④

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
[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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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하지는 않지만 변주한다’고 한다. 역사는 똑같이 되풀이되지 않지만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다시 나타나는 일을 반복한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잘 알고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국가가 흥망성쇠와 부침을 거듭하면서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했다. 국가는 없어지고 정치체제는 바뀌더라도 민족은 영속하고 외교는 필요하기에 역사를 더 알아야 한다.
 
지난 백년의 국제정치를 되돌아보면 국제질서의 기본 틀도 여러 번 바뀌었다. 2차 대전 이전까지는 주권국가 중심의 국제체제, 즉 베스트팔렌 체제가 국제질서의 기반을 이루었고 그 질서 속에서 영국이 200년 세계를 지배하였다. 2차 대전 후 미국이 세계 중심국가로 등장하면서 미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국제질서를 재편하였다. 이 질서는 자유적 다자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질서였다. 즉, 개별국가보다는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의 권능이 더 커지고 개별국가는 국제기구나 국제재판소에서 내린 결정에 따르는 시대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자유 무역체제가 활성화되면서 마침내 세계화의 시대를 열었다. 그래서 국가간 장벽이 낮아지고 상품과 자본 그리고 노동마저 자유로이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평평하다(World is Flat)>이란 책이 미래 세계상을 잘 그려냈다고 호평을 받았다. 게다가 20세기 후반을 지배했던 미·소가 중심이 된 진영대결도 자유진영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서방에서는 <역사의 종언>이란 책이 인기를 끌었는데 이 책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역사는 발전의 종착역에 도달하였다고 보았다. 더 이상 역사발전이 불필요하다고 볼 정도로 미국 자유주의 대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이런 흐름을 타고 1989년 소련 몰락 이후 거의 30년간은 미국이 단극체제, 즉 미국이 견제받지 않고 전 세계를 주무르는 미국 중심 체제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미국의 제조업이 점차 쇠퇴하면서 미국은 IT 기업과 금융자본에 의존하여 경제를 지탱해 왔다. 사실 쇠퇴하는 자국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애써야 할 시기에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20년이나 지속하면서 오히려 자국의 성장 잠재력을 더 고갈시켰다. 이를 알아챈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미국 우선주의를 내놓고 2016년 당선되었다. 그런데 트럼프의 실정으로 인해 바이든 행정부가 다시 집권하게 되고 민주당 정부는 미국을 세계의 중심, 즉 지도국의 지위에 되돌려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바이든의 미국은 자유적 국제질서를 다시 회복하려고 노력하였고 러-우 전쟁에도 이-팔 전쟁에도 개입하였다. 그러나 이 개입은 별 성과도 내지 못하고 미국을 피폐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미국 유권자들이 판단함으로써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이제 막 출범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자유적 국제질서’의 종언을 의미한다. 2차 대전 후 미국 지도층이 확신했던 자유적 국제질서 시대는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오히려 2차 대전 이전의 베스트팔렌 체제와 유사한 각자도생의 체제, 즉, 각 국가가 자국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경쟁하는 시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우리의 외교체제와 외교에 대한 기본인식도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이 단극체제를 열게 된 원인은 공산권의 몰락이었다. 이때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 추진을 선언하였다. 이 정책은 당시 변화하는 국제정세 흐름에 올라타 우리 외교의 지평을 공산권까지도 확대하려는 담대한 구상이었다. 북방정책을 통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 내고 궁극적으로 극동, 연해주를 거쳐 유라시아 대륙까지 우리의 경제영토를 넓히려는 웅대한 꿈을 실현코자 하였다. 모스크바와 북경을 통해 평양에 들어가려 구상, 즉, 공산권 국가들과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하여 통일을 견인해 내려는 생각이었다. 이 구상은 자유와 공산진영 간 체제경쟁은 이미 자유진영의 승리로 끝났으며 공산권 국가들은 자유진영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는 낙관론을 근거로 수립된 것이다. 북방정책은 우리 외교가 국제정세 변화를 잘 파악하고 미리 준비하여 그 흐름을 잘 올라타서 성과를 이룬 창의적이고 야심적인 외교정책이었다. 그 후 우리는 46개 공산권 국가들과 국교를 수립하여 우리 외교의 지평을 대폭 확대하였다. 또 공산권 국가들과 교역도 대폭 증가하면서 벌어들인 외환은 당시 우리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1989년에 발동을 건 이후 35년간 지속하면서 성공적이라 평가받았던 북방정책을 이제는 재평가할 시점이 왔다. 즉, 국내의 ‘87년 체제’에 빗대어 말하자면 외교에서 ‘89년 체제’도 이제 그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여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외교 패러다임을 수립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는 89년 이후 미 단극체제에서 통용되던 외교 전략적 사고나 외교수행 방식 등을 재점검하여 시대에 맞지 않는 점은 과감히 개선해 나가야 한다. 더 바람직한 것은 앞으로 미·중 패권경쟁의 결과가 명확히 되는 시점까지 가지고 갈 새로운 외교정책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미국의 단극체제가 더 유효하지 않고, 중국과 러시아가 자유진영의 일원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점과 북한과의 통일이 남북한 간 대화에 의해 달성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즉, 자유주의 승리의 깃발이 휘날리던 89년 당시와 정반대의 상황이 앞으로 벌어질 것이라는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냉전 종식이 아니라 신냉전의 도래가 더 확실해지고 북·중·러 3각 협력과 한·미·일 3각 협력 간 갈등과 대립이 더 격화될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단순히 트럼프의 재등장으로 미국 우선주의가 횡행할 것이란 지점에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선 안 되며 그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당연히 89년 당시의 낙관론 대신 비관적인 전망을 바탕으로 수립되어야 한다. 더 이상 국제정세는 미국 주도하에 안정적이지 않고 중국, 러시아도 우리의 협력 대상국이 될 가능성이 적어졌다. 미·중 간의 갈등심화로 우리가 미·중 간의 등거리 외교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줄어들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북한도 더 이상 우리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 주도로 남북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거나 북한을 흡수통일할 수 있는 상황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기가 힘든 상태로 나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한·미동맹에 의존하기보다는 우리 혼자 북한을 대적해야 할 가능성이 더 많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89년 이후 우리가 지녔던 관행적 외교 전략과 사고를 재검토해야 한다. 즉 우리의 안보를 한·미동맹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미국이 주도하고 우리는 보조하는 외교, 안보 태세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적절한지 자문해야 한다. 그리고 미·중 양국간 경쟁에서 우리가 양국간 정치, 이념의 차이를 불문하고 경제적 이익 관점에서 양국관계를 설정하거나 등거리 외교를 계속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도 지양해야 한다. 중견국인 우리나라에게 가치 기반 국제질서가 유익하지만 앞으로 이런 질서가 변형될 것이기 때문에 가치만 내세우는 외교도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과도 통일을 바라보며 무리하게 대북접근을 하기보다는 당분간 현상유지에 주력하는 방식으로 자세전환을 해야 한다. 일본과도 과거사에 얽매여 갈등을 지속하기보다는 우리의 안보를 위해 서로가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89년에 북방을 향해 달려 나가기 위하여 위세 있게 내걸었던 북방정책식 사고방식을 접어야 할 때이다. 이제는 북방으로부터 오는 위협과 변화된 국제질서의 파고를 넘어가기 위해 몸을 낮추어야 할 때이다. 우리의 발밑 진지를 깊이 파면서 다가오는 위험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실용적 외교·안보 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이백순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독문학과 △주미얀마 대사 △국회의장 외교 특임대사 △주호주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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