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의 Indonesia Story] 대항해시대 유럽 열강이 인도네시아 이 곳으로 몰려온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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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입력 2025-01-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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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2019년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며 조코위 전 대통령은 인도네시아의 황금기가 2045년 도래할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이 비전은 현 프라보워 정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조코위는 황금기로의 진입 기준 중 하나로 세계 4대 경제 강국을 거론했다. 1945년 독립 후 100년이 되는 2045년, 인도네시아가 미국, 중국, 인도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부강한 국가로 자리 잡으리라는 주장이었다.
인구와 자원이 풍부하지만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국가로 인도네시아를 바라보는 인식이 지배적인 우리에게 4대 경제 대국이라는 목표는 정치적 수사처럼 비추어질 수 있다. 나 역시 이러한 전망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2010년대 초반,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경제 규모가 십여 년 내 역전될 것이라는 예상이 제기되었지만, 현재까지도 비슷한 순위가 유지되는 상황을 기억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개발 상태의 인도네시아를 오랫동안 지켜본 경험이 내 회의적 시각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론만으로 황금기 주장을 예단할 수는 없다. 2020년대 초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GDP는 세계 11위 내외, 인도네시아는 16위 내외였다. 몇몇 연구 기관은 2030년 이후 양국의 순위가 역전되며, 2050년에는 인도네시아가 세계 4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는 반면 한국은 15위권 밖으로 밀려나리라 예측했다. 이러한 자료 때문인지, 인도네시아 사람들, 특히 지식인과 관료들은 경제 대국으로서의 미래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강하게 표현하며 경제 성장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평가했다.
미래의 인도네시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불명확하지만, 과거의 인도네시아, 더 정확히 말하면 인도네시아 영토 내 한 지역이 세계사의 중심에 있었던 점은 분명하다. 대항해시대라 불리던 15-17세기, 세계열강의 자리를 놓고 다투던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인도와 중국 모두가 간절히 원하던 물품의 생산지가 현재 말루쿠(Maluku)라 불리는 군도였기 때문이다.
말루쿠와의 교역 욕구는 유럽 열강이 지리적으로 떨어진 동양으로 항해하려 한 핵심 원인이었다. 교역을 통해 얻은 부는 이후 유럽 식민제국의 탄생을 뒷받침했다. 말루쿠를 제외하고 그 어떤 곳에도 존재하지 않던, 인도네시아를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바로 그 물품은 정향과 육두구라는 향신료였다.
정향은 못과 비슷한 모양을 가졌다고 해서 한자 ‘못 정(丁)’과 ‘향기 향(香)’을 결합해 만든 말이다. 육두구는 중국에서 사향 냄새가 나는 호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독특한 향을 가진 향신료다.
두 향신료 모두 우리의 일상에서 활용되기보다는 귀한 한약재로 사용되었다. 한의학 대사전에 따르면, 육두구는 맛이 맵고 쓰며 성질이 따뜻해 설사와 구토를 멈추고 식욕을 돋우며 음식 소화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정향도 맛이 맵고 성질이 따뜻하며, 배가 차고 아프거나 설사하고 식욕이 없을 때, 소화 장애, 무릎과 허리 통증, 음부가 차고 아플 때 쓰였다. 맵고 쓴 특징을 어림잡기 위해서는 정향과 육두구가 은단과 활명수의 재료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된다.
정향과 육두구는 고대부터 중요한 국제 무역 물품이었다. 두 향신료가 인도로 유입된 후 서쪽으로 계속 전파되어 로마에 이르렀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었다. 음식의 맛과 향을 더하거나 저장에 활용하기 위해, 종교적 의례에서 향을 피우기 위해, 강한 체취나 입 냄새를 없애고, 병마를 퇴치하거나 흑사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중세에 접어들어 중동 이슬람 왕국의 영향력이 커지자, 향신료 무역은 아랍 상인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에 따라 말루쿠의 향신료가 유럽 소비자에게 전달되기까지의 중간 단계가 늘어났고, 원산지보다 수백 배 더 비싼 값에 거래되기도 했다. 이러한 가격 상승은 생산지를 찾아 직거래하려는 욕망을 자극했다.
16세기 말루쿠 군도는 술탄에 의해 통치되는 몇 개의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새로 유입한 유럽인은 내부 경쟁에 이용될 새로운 자원으로 여겨졌으며, 향신료를 중심으로 한 이합집산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하나의 술탄국이 포르투갈과 교역 연맹을 맺으면, 다른 술탄국은 스페인을 조력 대상으로 삼았으며, 네덜란드와 영국 역시 토착 세력과 연합하거나 대립 관계에 놓였다.
유럽과의 접촉 초기에 형성된 대등한 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럽에 유리한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강력한 화력을 지닌 유럽인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점점 더 우위를 점했고, 그에 비례해 토착 왕국의 영향력은 축소했다.
17세기 중반을 거치며 네덜란드가 유럽 세력 중 우위를 점하며 향신료 거래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자, 토착 왕국은 실권 없는 이름뿐인 정치체계로 전락했다. 다음 세기에 접어들어 토착 왕국은 식민 통치에 편입되었다. 막대한 부의 창출과 기술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향신료 무역은 유럽 제국의 패권 강화를 가져왔지만, 현지인에게 있어 이는 주권 상실을 의미했을 뿐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말루쿠는 세계사의 중심에서 멀어져 갔고, 19세기 향신료 재배가 다른 지역에서 가능해지고 그 가격이 폭락함에 따라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번 겨울, 말루쿠 군도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한국에서 7시간을 비행해 자카르타에 도착한 후, 다시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4시간여 만에 도착한 말루쿠 군도의 터르나테(Ternate) 섬은 처음에는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였다. 오토바이와 자동차로 북적이는 도심의 좁은 거리와 도로 옆으로 늘어선 나지막한 건물은 자바에서 보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지 주민과의 대화를 통해 이러한 평범한 모습이 사실은 평범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자바의 거리와 유사한 풍경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축 자재 대부분이 자바에서 수입되었다는 것이다.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산물조차 대부분 수입품이었다. 벼를 경작할 토지가 없기에 사고(sago) 가루를 대신해 새롭게 주식으로 자리 잡은 쌀마저 외부에서 들여와야 했다. 향신료가 주요 수입원인 터르나테의 경제는 인도네시아 중심부에 철저히 종속된 듯 보였다. 그 결과 터르나테는 자바보다 훨씬 높은 물가를 감내해야 했고, 같은 수입으로 더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터르나테 섬의 중심부에는 화산이 솟아 있었다. 주기적인 화산 폭발 과정에서 분출된 화산재와 연중 지속되는 강우는 향신료 성장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다. 섬의 규모는 과거 이곳이 세계사의 중심지였음을 의심하게 할 만큼 작았다.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 도로를 일주하는 데 한 시간 반 정도면 충분했다.
해안 도로를 따라 돌아다니며, 이 섬이 과거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가 건설한 요새가 연이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적지 역시 이곳의 현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 방문객은 거의 없었으며,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는 세계사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나아가 인도네시아의 변방으로 밀려난 역사적 현실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러나 여행 과정에서 반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역 사학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향신료 루트’라는 표현을 거론했다. 말루쿠에서 시작해 말레이반도를 거쳐 중국과 인도, 나아가 중동과 유럽으로 이어진 향신료 루트와 관련된 역사를 중앙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에 등재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 루트로 인해 토착 왕국이 사라지고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음을 떠올리던 내게 학자들은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향신료 교역 덕분에 세계의 여러 문명이 말루쿠에 모일 수 있었고, 다양한 문화의 교류와 혼합을 통해 문화적 풍요로움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들은 토착 언어에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나아가 중국어 어휘까지 유입되었음을 언급하며, 국제 교류에서 말루쿠가 차지했던 중심적 역할을 강조했다.
처음에는 이 해석을 들으며, 외부인에 의한 착취와 학살의 역사를 무시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즉 식민 역사를 미화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인도네시아의 황금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정부가 유포하는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인도네시아라는 담론이 이곳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했다. 식민 역사의 참혹함을 잊지 않지만, 말루쿠, 나아가 인도네시아가 한때 세계사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부각하려는 새로운 역사관이 출현한 것이다.
황금기로 나아가기 위해 프라보워 대통령은 연간 8%의 경제 성장률을 목표치로 제시했다. 경제가 잘 운영되었다고 이야기되는 지난 10년간의 경제 성장률이 5% 내외였음을 고려할 때,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라 할 수 있다. 상당수 경제학자가 회의적인 시각을 취하고 있음을 지적한 프라보워는 한 국가의 지도자라면 용감하게 높은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늘만큼 높게 이상을 설정할 경우, 하늘에 닿지 못하더라도 별 위에는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한 후, 군인으로서의 자기 경험을 예로 들며 8% 성장이 불가능한 목표가 아님을 역설했다.
자기 비하적이거나 자기 비판적인 시각으로 인도네시아의 현실을 평가하는 현지인의 모습에 익숙했던 나에게 있어, 세계사의 중심을 강조하는 말루쿠의 역사 해석이나 인도네시아의 황금기에 대한 확신은 과거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긍정적이고 희망에 찬 인식이 대두되는 최근 상황을 보며 낯섦과 함께 일말의 기대감이 피어오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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