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작금의 한국 정치현실을 보노라면, 암울했던 일제시대에도 이 나라의 먼 장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었던 인촌 김성수(1891~1955)같은 지도자를 그리워하게 된다. 마침 이 절묘한 시기에, 원로 법조인인 이진강 변호사와 언론계 출신 황호택 교수가 지도자상에 목마른 우리에게 필독의 양서인 《인촌 탐사》를 출간한 것에 축하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인촌 탐사》는 인촌에 관한 평전 형태로 쓰여졌으며, 전장 6부로 나누어져서 있다. 이 평전의 초반부에서는 인촌의 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인촌의 유년 시절, 그가 신학문을 습득하기 위해 군산을 거쳐 일본 유학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본유학 이후에는 한국의 장래를 위한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사업을 시작한 것을 소개했다. 4부와 5부에서는 장래 한국의 교육을 위해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발전시킨 일과, 그리고 중앙학교 기숙사를 근거로 3·1운동의 진원지로 삼으면서 3·1 운동에 기여했던 역할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산업과 기업의 근대화를 위해 경성방직을 인수 경영 한 일과, 민족의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오늘의 대표적인 민족사학으로 발전시켜, 수 많은 우리의 지도자를 배출한 일, 그리고 대중 교육과 언론 창달을 위해 동아일보를 창간한 일이 이어진다. 특히 4부에서는 기존의 인촌평전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적인 이야기들이 나와 눈길을 끈다.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간 인촌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따님의 결혼식에 불참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인촌의 심사를 살펴볼 수 있다.
만년에는 하는 수 없이 정치에도 참여하면서, 확고한 반공 노선과, 후에 경제발전의 초석이 된 농지개혁에 앞장섰다. 당대 한국의 최대 지주의 한 사람이면서도 농지개혁 입법과 그 시행에 앞장서서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은 인촌의 지도력에 힘입었다고 하겠다. 농지개혁없이 6.25를 맞았더라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걸음마 단계였을 시기에 한국의 정당정치 발전에도 인촌은 큰 기여를 했다.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낸 것도 숙명인지도 모른다. 부통령으로 재직했을 때는 이승만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점도 소상히 전하고 있다. 이 평전을 읽노라면 당대 한국 최대 부잣집 아드님으로 자신은 평생을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먼 장래를 위해 어려운 길을 택한 그의 선택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들은 이 파란만장한 인촌의 생애를 기록하기에는 367페이지의 글과 93장의 사진만으로는 부족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 한정된 지면에서 가장 간결하고 조리 있게 인촌의 일생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잘 묘사했다. 글의 경제성은 저자들이 법률가 출신이고, 다른 한 사람은 언론인 출신이기에 가능한 모양이다.
《인촌 탐사》가 기존의 다른 인촌의 평전과 차이가 있는 점은, 저자들은 이 평전을 쓰기 위해 인촌의 손길, 발길, 그리고 그의 혼이 깃들었던 곳이면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그리고 인촌과 교우한 사람이면 누구든지 만났다. 나에게는 두 번이나 (중앙고등학교시절, 그리고 연세대학교 시절)스승이신 105세의 김형석 교수님으로부터는 직접 글을 받았다.
저자들이 이 글을 쓸 때는 펜으로 쓴 것이 아니고 저자들의 뜨거운 '가슴'으로 썼기에, 독자들과의 감정이입(感情移入)이 자연스러운 모양이다. 저자들은 인촌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후대의 검증을 의식하며 팩트를 중시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이 책을 읽노라니 70년 전인 1954년 15살의 소년이던 내가, 중앙학교 본관 2층 남향한 창 너머로 흰 한복차림으로 본관 앞 잔디밭의 잡초를 뽑던 인촌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55년 2월 24일 궂은 비가 내리던 성동 원두(原頭)에서 거행됐던 인촌의 국민장 날에는 만장을 들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나를 생각하게 한다. 아직도 인촌을 기억하고 있는 나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이 평전은 인촌과 재상봉을 하는 감을 주고, 인촌과 같이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인촌을 "위대한 영웅" 이나 "민족의 태양"과 같은 교언(巧言)하는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인촌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선각자이며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혜안을 가진 우리 민족의 참다운 지도자이자 '스승'이었다고 느끼게 쓴 저자들의 글 솜씨가 부럽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등에서 인촌을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행위 등에 관해서도 법조인 출신 저자와 '탐사보도'기자 출신의 저자가 인촌에 관한 예우와 처우에 관해 저자들의 전문분야의 혜박한 지식으로 인촌을 비판한 사람들에게 좀 더 비판적인 입장에서 책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저자들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다. 저자들은 인촌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스스로 인촌에 관해 평가를 하도록 하는 원숙한 처신이 돋보인다.
내가 광화문 교보문고 본사 건물 인근에 살기에 그곳을 지나면서 교보문고 건물에 쓴,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쓴 문구를 자주 읽게 되는데, 그 말처럼 장래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촌 탐사》를 읽고 훌륭한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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