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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노동과 음악의 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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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 작가
입력 2025-02-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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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 작가]
[이두수 작가]

입춘이 지났다. 입춘이라고 해서 바로 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계절의 변환점인 지금이 가장 겨울다운 날씨일지 모른다. 오늘도 이곳 광주 일곡 현장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공사현장에서 방진막 너머로 바라다보는 눈 오는 풍경이 진경산수화처럼 보인다.

하늘에서 눈은 소리 없이 소복하게 내리건만, 땅에서 눈을 밟는 소리는 소란스럽기만 하네. 雪は音無しで爽やかに降るが、雪を踏む世の音は騒々しい。-平作人

계엄과 탄핵정국으로 나라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도시 거리마다 증오의 구호와 함성으로 가득하다. 다들 구국의 심정으로 뛰쳐나왔겠지만 하루속히 진정되길 바랄 뿐이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빠짐없이 나타나는 것이 음악이다. 노래 자체가 감성에 호소하는 면이 강하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들으면 공감과 결속력이 강해진다. 아마 이런 현상은 예술 가운데 특히 음악이 집단의 행위, 즉 함께 노동하는 가운데서 자연발생한 긴 역사적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 초기의 예술은 주술적인 또는 의식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 내용은 대개가 풍요와 다산을 염원하고 있다. 그러한 간절한 주술적 염원들을 영상화 한 것이 예술의 시작이다. 예를 들어, 고대 동굴 벽화나 조각품은 풍요와 다산, 그리고 자연의 힘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주술적 염원을 시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망과 염원을 보다 구체화하고, 그 힘을 빌려 현실에서 성취하고자 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예술 작품들이 인간의 내면 깊숙한 염원과 소망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예술은 단순한 미적 경험을 넘어, 인간의 감정, 신념, 그리고 염원을 전달하는 강력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역사적으로 노동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노동의 고통과 피로를 해소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노래와 춤이 활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노동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음악이 존재해 왔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사의 리듬에 맞춰 노동요를 부르며 일했고, 산업혁명기에는 공장 노동자들이 기계 소음 속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음악과 문학을 만들었다. 산업혁명기 이전, 담배나 목화 특히 설탕을 만들기 위한 사탕수수 농장에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노동요가 리듬, 블루스, 재즈 등으로 발전한 것처럼 노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태어났다.

예전에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행적을 따라가다가 미국 남부 멤피스에 간 적이 있다. 로큰롤(Rock and Roll)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적 고향이다. 당시 멤피스는 다양한 음악 장르가 공존하는 곳으로, 블루스, 로큰롤, 소울 음악과 더불어 컨트리 음악에도 기여한 바가 큰 곳이었다. 이곳에서 리듬앤블루스를 처음 들었다. 리듬 앤 블루스(Rhythm and Blues, R&B)는 20세기 초 미국 남부에서 시작된 블루스와 가스펠을 기반으로 발전한 음악 장르다. 리듬앤블루스(R&B)는 미국 남부 흑인 노예들이 그들의 고된 노동 속에서 불렀던 노래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들의 노래는 단순한 노동의 리듬을 넘어서 그들의 고통, 희망, 그리고 자유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노래는 나중에 블루스, 재즈, 소울 등의 다양한 음악 장르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예술(여기선 음악)은 노동의 과정에서 탄생하고 발전해왔다. 노동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은 인간의 창조성과 강인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러한 예술의 힘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이런 노동과 예술의 관계가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특히 건설 노동 현장 같은 곳에서는 새로운 음악이 탄생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적 표현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예전에는 노동이 공동체적인 성격을 띠었지만, 지금은 개별적이고 기계적인 노동이 많아졌고, 지금은 노동이 생존권이 달린 절박한 상황도 아니고, 그래서 노동자들도 직접 예술을 생산하기보다는 소비하는 방향으로 바뀐 것일까. 아니면 예술이 밥 먹여주냐? 하는 본초적인 질문에 ‘아니다’라는 집단적인 깨달음이 있었던 것일까.

언젠가 60이 넘으면 남미 아르헨티나에 탱고(땅고)를 배우러 유학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은 아직도 유효하다. 탱고의 리드미컬한 음률과 여기 맞춰 춤을 추는 남녀의 춤은 너무 매혹적이다. 내 인생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에 적당할 거 같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시작된 탱고는, 초기에는 사교적인 춤이 아니라 노동자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탱고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예술 형식이 되었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탱고는 그들의 문화가 혼합되며 탄생한 독특한 춤과 음악이다. 특히 이탈리아, 스페인 이민자들의 전통 음악과 아프리카 리듬이 결합되었고, 거기에 아르헨티나의 전통 음악인 밀롱가(milonga)와 하바네라(habanera)의 영향이 더해진 것이다. '사랑은 길들지 않은 새'라는 유명한 가사로 시작하는 하바네라는 조르주 비제가 작곡한 오페라 '카르멘'의 중요한 아리아 중 하나로 부르는 곡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많은 현대 음악 장르 특히 블루스, 재즈, 리듬 앤 블루스(R&B), 가스펠 그리고 탱고 등은 고된 노동에서 비롯된 감정의 표현물들이다. 당시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통, 저항, 생명력, 희망이 음악을 통해 표출되었고 이 음악들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에는 왜 이런 종류 아니 변화된 노동현실에 맞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등장하지 않는 걸까.

어느 날 104동에서 땜빵을 하며 세대를 돌다가 아주 감미로운 음악을 들었다. 기계음이나 파열음 같은 거친 소리만 가득한 건설현장에는 안 어울릴 거 같은 감미로운 클래식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현장에 카페가 생겼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찬 바람을 막기 위해 출입구에 설치해 놓은 비닐막을 제치자 거기엔 조적공이 우아한 음악을 들으며 벽돌을 쌓고 있었다. 물론 작업을 위해 설치한 라이트이긴 하지만 조명 빛이 빛나고 커피포트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의 작업 공간은 아늑했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일하면 작업 능률도 좋아지고 무엇보다 피로감이 덜하다고 한다. 그는 내게 커피 한잔을 권했다. 따뜻했고 맛도 좋았다.

현재 건설 현장에서 새로운 음악 장르나 창의적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만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경제적 요인, 그리고 현대 노동의 특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흑인 노예들이 음악적 저항을 통해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것처럼, 현재의 노동자들도 자기 표현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지만,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는 그 표현이 나타날 수 있는 여건이나 장소가 부족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제한된 범위에서라도 자기 표현의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하면 건설 현장과 같은 힘든 노동 환경에서도 음악이나 문화적 창작이 나타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또한 그들의 경험이 보다 문화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

건설 노동자들이 문화 예술의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보다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적 교양은 단순히 학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에, 건설 현장과 같은 고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한 이유는 첫째, 자기 표현의 능력이 향상된다. 다양한 인문학적 분야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이렇게 자기 표현을 통해 노동자들은 문화적 생산자로서 새로운 음악, 예술, 혹은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둘째 사회적, 문화적 이해를 증진시킨다. 건설 노동자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일하고 있다. 최근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늘었다. 인문학을 배우면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능력이 길러져, 협업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 또한, 노동자들이 사회적 문제나 문화적 현상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인 생산물도 더 풍부하고 다층적이 될 수 있다. 셋째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정신적, 정서적 해소를 가져올 수 있다. 힘든 노동 환경에서 정신적 해소는 매우 중요하다.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면 문학이나 철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거나, 미술이나 음악을 통해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인문학 교육은 노동자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안전 교육과 인문학 교육의 결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재 건설 현장에서의 안전 교육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안전 교육이 신체적 안전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 안전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인문학적 교육을 안전 교육과 결합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안전 교육 중에 감정 관리나 정신적 웰빙을 다루는 시간을 마련하면, 노동자들이 일상적인 스트레스나 고된 노동 속에서도 정신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문학이나 철학을 통해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다. 둘째, 건설 현장에서 팀워크가 중요한데, 안전 교육 시간에 소통의 중요성과 협력을 다루는 인문학적 접근을 도입한다면, 노동자들이 더 효과적으로 팀워크를 형성하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안전 교육 시간을 통해 예술적 창작이나 자기 표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좋겠다. 문학, 그림, 음악 등을 다루는 미니 워크숍을 열어, 노동자들이 창의적인 활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나아가 그들이 새로운 문화적 생산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건설 노동자들이 단순히 예술과 문화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교육은 필수적이다. 국민 한사람 한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재능을 최대로 발휘토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건설현장에서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이것이 우리 사회의 희망 아닐까.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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