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이 1964년 발표한 동화책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정치적 올바름에 맞춰 수정 출판하자 깨어난 윌리라고 제목을 바꾸자고 비판했다](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5/02/10/20250210102751799033.jpg)
동시대 미술의 깨어있음과 살아있음
약 30년 동안 동시대 미술을 지배해 온 ‘깨어있음(Woke)’이란 주제는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에 있었던 논란은 많지만, 의미심장한 말이다. 어떤 사람은 ‘올바르고 깨어있는 예술’을 사회 변화를 위한 긍정적인 힘으로 보지만, 어떤 이는 지나치게 분열적이고 정치적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카라 워커(Kara Elizabeth Walker, 1969~), 캐리 메이 윔스(Carrie Mae Weems,1953~)처럼 작품을 통해 인종, 성별, 성적 지향, 계급 문제를 다루거나 제니 홀저(Jenny Holzer, 1950~),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1945~),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처럼 소비문화, 미디어,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 등을 비판하는 다원성을 특징으로, 절대 진리를 부정하고 중심과 주변의 질서를 해체해 위기의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차발랄라 셀프(Tschabalala Self,1990~), 가다 아메르(Ghada Amer,1963~), 엘 아나추이(El Anatsui,1944~), 키얀 윌리엄스(Kiyan Williams,1991~)같은 유색인종 작가들은 예술의 본령을 지키면서 다양성(Diversity), 형평(Equity), 포용(Inclusion)을 주제로 사회적 올바름과 깨어있음을 작품으로 실천해 왔다. 이렇게 해서 올바르고 깨어있는 미술은 21C 동시대 미술을 관통하는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렇듯 깨어있는 작품이 각광받으며, 하나의 경향이자 장르가 되어 미술관과 비엔날레의 중심을 차지했다. 이렇게 올바르고 깨어있는 작품이 대세를 이루자, 작가로서 성공하려는 야망을 지닌 이들은 곧 이 길이 작가로서 입신할 수 있는 지름길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후 작가들은 경쟁적으로 더 강력하고 폭력적인 메시지 또는 도를 넘는 충동적인 작품으로, 누가 더 강하고 세게 말하는가를 경쟁하면서 '행동하는 양심'을 자처하며 세상의 모든 일을 도덕적 잣대로 측정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지난 수십 년간 작가는 물론 비평가, 큐레이터는 거의 모두 해체주의(Deconstruction), 후기구조주의(Post Structuralism),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 가속주의(Accelerationism), 형이상학(Metaphysics), 정신 지리학(Psychogeography)등 현대 철학의 하위 장르와 관련된 동시대 미술 생산에 전념했다. 따라서 동시대미술의 범위가 급격히 좁아졌고 따라서 그것을 해석하는 데 사용되는 이론적 틀도 좁아지고, 작품에 대한 설명도 ‘탈식민주의(De-colonialism)’, ‘퀴어 이론(Queer theory)’ 언어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많은 비평가와 미술사가들은 이런 현상을 보며 도를 넘었다고 생각하면서 ‘올바르고 깨어있는’ 예술의 본질적인 의미를 묻기 시작했다. 특히 매우 직설적이고 실제적인 작품까지도 사회의 공기로서 ‘깨어있는 예술’의 순기능에 동의하면서 이들의 예술행위를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했던 이들까지도, 과도한 비난, 대안 없는 비판이라고 지적하기 시작했다.
글과 그림으로 가장 깨어있다고 자처하며 깨어있음의 최전선에서 세상을 향해 발언하던 예술가들이 미술시장의 흐름에 과도하게 반응하면서 소위 사회적 불평등의 근원으로 여기는 깨어있지 않은 대표적인 그룹인 부유한 자본가, 컬렉터들과 교류하며 고급 식사, 호사스러운 파티, 약물을 즐기는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며 부유한 수집가에게 고가로 작품을 판매해 재정적 이익을 얻는 이들이 나타나면서 이들의 본심은 사회로부터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있음'을 작업의 중심에 둔 일부 작가들의 모순된 사적 활동이 속속 드러나면서 그들의 작품과 말과 행동의 진정성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이들의 '언행 불일치'는 이런 의문과 질문을 더욱 확대했다.
![카라 워커 노예 노예제 그림 같은 남부 노예제 1997 오린 종이와 접착제 벽에 붙이기 37 x259m 피터 노턴과 에일린 해리스 노턴 컬렉션 사진워커 아트 센터](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5/02/10/20250210102947560609.jpg)
깨어있음을 강권하는 사회
도덕을 바탕에 둔 올바름이 너무 선택적으로 적용된다는 주장도 힘을 얻기 시작했다. 동시대 미술의 정치적 에너지는 ‘행동주의(Activism)’와 만나 많은 억압과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여러 곳에 스며들며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 하마스의 습격과 양민 납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탈레반의 여성 탄압, 성별, 연령, 국적, 문화적 배경 때문에 차별을 감수하는 난민, 내전으로 살해되는 아프리카의 여성과 어린이 문제에는 들에 침묵 또는 외면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유독 큰 목소리를 내는 선택적 행동주의는 동시대 미술의 당파성이란 비난과 함께 어려움이나 상황과 처지가 여성, 선주민, 유색인종, LGBTQ+와 의 무게나 정도가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중시하는 이중적 태도에 대해 '왜 말하고 행동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다수가 하기 시작했다. 원래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은 도덕에 기초해 서로 말과 행동을 주의해 공평한 포용적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깨어있음이란 말과 함께 사용되면서 개념도 불분명하고, 추상적인 ‘올바른’, ‘깨어있는’, ‘개념 있는’이란 말은 어느새 누구나 지켜야 할 21C 초 하나의 사회적 표준이자 규범이 되었다. 이들은 ‘정체성 정치’의 공론장에서 무게감 있는 목소리를 내고자 이성적이며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보다는 자신을 소수자나 희생자로 포장해 약자의 이미지를 선점했고, 이런 안타까운 상황은 주변 사람들의 감정선을 자극해 그것을 ‘힘’으로 삼았다.
![떠오르는 신예 흑인여성작가 차발랄라 나 자신에 의해 볼티모아 미술관 설치전경 사진Mitro Hood](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5/02/10/20250210103054417103.jpg)
로알드 달(Roald Dahl,1916~1990)이 1964년 발표한 동화책 '찰리와 초콜릿 공장(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은 ‘정치적 올바름’에 맞춰 수정 출판하면서 '깨어난 윌리'라는 조롱을 받았다. 디즈니는 영화 '인어공주'에서 유색인 할리 베일리(Halle Lynn Bailey, 2000~)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로알드 달의 전기를 쓴 매튜 데니슨(Matthew Dennison)은 “정치적 분위기로 촉발된 소설의 수정은 어린이가 아닌 어른들이 만든 것”이라 지적하며 ‘정치적 올바름’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기계적 중립’을 비판한다며 소리를 낮춰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이 문학의 표현을 검열하고 있다'고 했고 심지어 ‘PC 하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어느새 사람들은 타인이 감정을 살피며 말을 자제했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사이 사회적 공평을 위한 올바름은 일부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더욱 오염되었다. 이들은 명분상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올바름을 수단으로 세상을 올바른 자와 올바르지 못한 자로 갈라쳐,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다. 이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집단'을 ‘개념 없음’ 또는 ‘올바르지 않다’고 규정해 ‘나쁜’이란 도덕적 프레임을 씌워 공격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 또는 자기편에는 끝없이 관대했다. 이들은 자기 진영 내의 불평등, 따돌림 같은 차별과 폭력은 감추거나 묵인했다. 올바름을 내세워 사회적 지위를 얻은 이들의 성폭행이나 성추행 사실이 연이어 드러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파업 참여자와 비참여자를 갈라 따돌리는 이들의 비도덕적인 '이중생활'이 알려지자 마치 해리성정체장애를 가진 환자처럼 행동하는 위선적인 태도를 취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술을 통해 사회통합에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위해 정치세력화, 이익집단화하면서 예술보다는 정치에 헌신하는 오염된 '행동주의'를 택하면서 결국 '올바르고 깨어있는' 사회적 정의는 문화예술에서 후퇴했고, 명분 없는 선택적 저항만 남았다.
딘 키식(Dean Kissick)은 꽤 오랫동안 미술계를 지배해 온 기계적으로 획일화된 ‘깨어있음’이란 미술계 현상을 두고 “보편적인 인간 경험에 초점을 맞추면서 혁신과 미적 엄격성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결국 “예술의 본령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그간 세상을 통합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예술가들의 말과 행동의 교정을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일부 정치가들의 전략에 말려 오염된 깨어있음을 경험한 이들이 사실을 깨닫자, 올바른 이란 대세에 밀려 못하고 담아 두었던 말을 용감하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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