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 활동가 낸 골딘과 시위대가 MET의 새클러 윙에서 단식농성 더러운 새클러가의 후원거부를 주장 사진Tamara Rodriguez Reichberg](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5/02/10/20250210143156815786.jpg)
오염된 '깨어있음(WOKE)'
혼탁해진 올바름이 미술장과 사회를 지배하면서 소속원은 이와 다른 생각이나 감정을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고, 사회적 비난을 의식해 스스로 말을 자제하는 자기 검열을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한국 사회의 올바름은 동시대 세계미술의 현장에서 이룩한 사회적 포용과 융합의 메시지에 비해 훨씬 정치적인 측면이 강화된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작가 개인의 정서는 물론 사회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스트레스가 되었다. ‘올바름’ 또는 ‘깨어있음’이 세상의 절대적 기준이 되면서, 다양한 관점과 삶의 방식을 지향했던 것이 오히려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억압하는 수단이 되어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해하며 사회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저해하는 의도치 않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깨어있음은 보수적 가치를 비판할 때 경멸적으로 사용되는 양극화된 말의 표본으로 사회적 분열을 낳는 말이 되어 버렸다. 많은 이들은 말의 본질과 의미와 상관없는 ‘올바른’,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고, 때로는 된 것처럼 '연기'해야 했다. 한국에서 '깨시민' 또는 '개념 있는 이'라는 말은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소수자를 포함하는 사회적 통합을 말했지만, 소위 개념 없는 자로 분류되는 순간, 사회로부터 배제되는 역차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은 사회적 ‘다수’가 오직 깨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소수’에게 자리를 내주고, 심리적 열패감과 정치적 힘을 잃어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사람은 원래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타인과 어울리는 소속감을 통해 사회의 구성으로서 심리적 안정을 얻는다. 따라서 심리적, 사회적으로 깨어있음이란 사회로부터 따돌림당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따르거나 따르는 척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일이었지만 올바름이란 선한 이미지의 힘 때문에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고 반론도 펼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강권했다.
역사적이며 중립적인 기관인 미술관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미술관의 전시는 가끔 행동주의 작가들에 의해 점거당했고, 환경기후운동가들은 전시 중인 작품에 테러를 가했다. 미술관 후원도 올바른 기업이나 기업인만 가려서 받아야 했다. 전시도 흑인, 여성, LGBTQ+ 같은 '깨어남'을 통해 힘을 얻은 작가들의 몫이 되었고, 작품 수집도 이들 작품을 중점적으로 수집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또 소수를 위해 모든 미술관 박물관은 트럼프 정부가 폐지를 명령하기 전까지 모두 '다양성, 공정성, 포용성(DEI)'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했다.
![2024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선주민 체로키족 예술가 제프리 깁슨의 작품 설치 전경 The Enforcer왼쪽 2024 WE WANT TO BE FREE오른쪽 2024 WE ARE MADE BY HISTORY 벽화 2024 나를 놓을 공간 의 일부 사진티모시 쉔크](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5/02/10/20250210143611305044.png)
결국 깨어있음을 선점한 이들은 도덕적으로 자신이 타인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하면서 올바름에 소극적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했고, 이렇게 생긴 사회적 갈등과 분열은 옳은 것, 깨어남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80년대의 치열했던 민중미술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밀도가 떨어졌지만, 한국의 깨어있다는 예술가들은 사회적 책임보다는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더욱 열심히 행동했다.
이런 깨어있는 사회적, 미술적 분위기는 타인의 동기를 불신하며, 모든 사람이 이기심 때문에 행동한다고 생각해 세상을 회의적이며 비관적인 태도로 바라보고, 타인의 진실과 선함을 의심하는 냉소주의(Cynicism)로 변해 갔다. 그리고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악마화하며 상대의 정책과 주장을 모조리 거부하는 극단적인 파당 정치로 이어져 민주주의(Democracy)를 비토크라시(Vetocracy)가 대신하는 정글이 되었다.
'깨어있음'에서 깨어나는 사람들
깨어있는 예술의 '이중의 삶'을 두고 비평가들은 예술가들이 사회 정의를 위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한편으로는 비판의 대상이 되는 자본주의, 부의 불평등과 결합하는 행동을 공허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일부 작가들은 진보적인 수사학을 사용하며 사회적으로 예술적 신뢰를 얻고 시장 가치를 높여 개인적인 이익을 얻고자 사회적 정의를 이용하는 일을 지적했다. 특히 소위 깨어있는 작가들의 정치적인 작품에 대한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사회 변화에 관한 진정한 주장과 헌신보다는 깨어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연기라고 지목했다. 이런 비판은 근본적으로 깨어있음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정치적 올바름과 깨어있음이란 개념은 처음부터 매우 논쟁적이며 논란이 많은 말이었다. 특히 누군가의 작품을 깨어있는 것으로 간주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는 극히 개인적 판단이며, 절대적인 옳음과 무조건적인 그름은 없으며, 다양한 관점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깨어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깨어있는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들을 구별하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깨어있음의 예술적 성과는 서구의 동시대 미술에 비하면 매우 미미했다.
세상의 차별을 없애려는 선한 의도에서 출발한 깨어있음은 사회적 존중을 받으면서 세상에 나왔지만,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사회가 깨어있음을 강요하는 선함의 폭력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예측할 수 없는 말과 거친 행동에도 불구하고, 미국 우선주의, 정치 경제적 엘리트에 대한 비판, 다수의 보편적인 사람의 대변자, 직설적인 말과 정책으로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이긴 트럼트 승리의 이면에는 그의 선거공약도 주효했지만 힘을 도덕적 소수에 밀린 다수의 상실감을 간파한 트럼프 진영의 이들을 이해하고 알아주고 회복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선거 전략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바바라 크루거 무제영원히 2017 비닐 벽지에 디지털 프린트 크기 가변적 57x287x183m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사진정희승](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5/02/10/20250210145422194827.jpg)
동시대의 정치적 올바름은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 신념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종의 조작이자 가스라이팅과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특정 사회 문제에 대해 존재를 부정하거나 이를 비판하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고립시키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서사(Narrative)를 도입하는 전술을 구사했던 사실도 알려졌다. 또 깨어있음을 자처했던 이들의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많은 다수의 사람들이 ‘깨어있음’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올바름에 대한 질문은 2025년 새로운 문화와 정치환경을 바탕으로 동시대 미술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사실 자유주의에 관한 이념적 합의가 깨져 많은 문화예술기관은 소수의 깨어있는 이들과 침묵하는 다수 사이에서 꽤 괴로운 시간을 보내며 고군분투해왔다. 특히 시대를 선도했던 특정 유형의 문화 정치 즉 깨어있음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서 미래에 대한 혼란과 불확실성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깨어있음’을 앞세운 저항으로서의 문화소비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새로운 개종자를 확보하기는커녕 많은 보통사람을 소외시켰다. 여기에 서구에서 등장한 강력한 우파는 이념적 변화에 힘을 보탤 것이다. 특히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동시대를 견인해 온 ‘올바름’이란 ‘말’과 ‘이념’이 분리되면서 패러다임의 붕괴로 이어져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 주었다.
특히 좌우 이념 대립과 정치적 양극화 현상의 심화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면서 오히려 ‘깨어있는 시민’이 정치와 사회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분열시킨다는 인식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소셜 미디어의 영향으로 정보의 확산과 다양한 의견 교환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가짜뉴스의 확산, 여론 조작 등의 문제를 낳으면서,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과거에는 주류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 금기시되었지만, 개인의 삶이 중시되면서 공동체 의식보다는 20~30대의 젊은 층에서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중시하는 다양한 가치관과 라이프 스타일이 존중받는 경향이 강화된 것도 새로운 '후기 깨어있는 시민의 시대'를 앞당기는 힘이 되었다.
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사회 변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적응력이 요구되고, 과도하게 어느 한쪽의 정치적인 입장을 요구받는 각각의 개인은 정치에 대한 환멸(Disillusionment)과 무관심이 확산되면서, 정치 참여를 꺼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후기 깨어있는 시민의 시대로의 전이를 가속화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2025년에는 공평한 세계에서 세상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미술의 역할은 지키면서 정치와 이별하고 스스로 아름다워진 동시대 미술이 세상을 ‘곱게’ 만들어 나가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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