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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삼성물산 형사 판결의 영향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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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중 법무법인 한결 변호사
입력 2025-02-1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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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중 법무법인 한결 변호사 사진법무법인 한결
김광중 법무법인 한결 변호사 [사진=법무법인 한결]

진공 상태에서 공기가 채워지는 데 필요한 에너지와 이를 다시 진공 상태로 만드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이론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열 손실, 기계적 효율, 공기 분자 흡착 등으로 인해 진공 상태를 만드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소요된다. 빈 공간을 다른 물질로 채운다면 그 차이는 더 커진다. 인식과 관계에 영향을 받는 인간의 삶에서는 빈 공간을 채우고 비우는 데 필요한 힘의 차이가 훨씬 더 클 것이다.

선례가 없던 상황에서 선례가 생기면 그 이후에는 선례를 따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선례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준이 되고, 따라오는 자와 일들에 대한 하나의 방향이 된다. 잘못된 것이어도 선례를 따르면 논증 의무가 완화되는 반면 선례를 수정하거나 변경하려면 논증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 공간을 채우는 선례는 그 크기와 무게, 의미를 정확히 측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더 많은 에너지로 그 선례를 비워낼 때까지 잘못된 선례의 영향이 더 크게 남는다.

삼성물산 합병 관련 재판들이 진행되고 있다. 배임과 분식회계 혐의 형사 재판이 있고, 분식회계 및 허위공시에 관한 행정소송과 민사소송이 진행 중이다. 행정소송 1심에서는 분식회계가 인정되었으나 지난 3일 선고된 형사 항소심 판결에서는 배임과 분식 모두 무죄 판단이 나왔다. 삼성의 승계 문제와 관련된 사건이기에 그 판결들은 중요한 선례가 되어 우리 사회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그 판결들의 크기와 무게, 의미를 정확히 측정해야 한다.

형사 항소심 판결 선고 이후 쏟아진 언론 보도와 논평의 대부분은 이재용 회장이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취지다. 그러나 행정소송에서는 분식회계를 인정했다. 형사재판에서도 ‘주가를 염두에 둔 평가’ ‘불리한 보고서 발표를 막으려는 요구’ ‘언론 보도 개입’ ‘대통령을 통한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개입’ ‘삼성증권 PB들의 찬성 의결권 위임장 수집’ ‘사전 동의 없는 삼성물산 주주들 연락처 수수’ ‘17만원 목표주가 설정’ ‘바이오젠의 콜옵션 공시 문제’ ‘회계처리 방안 선택 후 결론에 맞춘 회계증거 수집과 문서 조작’ 등이 인정되었다. 고의 등 유죄 요건 입증에 관한 증거는 많았지만 검찰의 증거 수집 절차 등 문제를 이유로 증거능력이 부정되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공장 바닥에 묻었다는 컴퓨터 서버들의 증거능력도 그렇게 부정되었다. 판결문 중에서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판단 부분만 62페이지에 달했다. 이번 형사 판결의 정확한 의미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형사상 유죄로 볼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죄 추정 원칙이 적용되는 형사재판에서는 유죄를 인정하려면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엄격한 증거'에 의한 입증이 필요하다. 그보다 낮은 정도의 입증을 요구하는 행정소송이나 민사소송과는 다른 차이점이다. 증거능력 인정 요건도 형사재판이 훨씬 더 엄격하다. 그래서 삼성물산 사건 기소 당시부터 그러한 형사 재판의 한계로 인한 무죄 선고 가능성과 그 경우 오히려 부정행위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결과를 우려한 전문가들이 있었다.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입수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행정재판에서는 분식회계 사실을 인정했다. 판단의 잣대가 다르면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 가장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기 때문에 위법행위의 단죄를 형사재판에만 의존하는 문제가 지적되는 이유다.

2009년 대법원은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발행 사건과 관련하여 이건희 전 삼성 회장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6대5의 근소한 차이로 결정되었지만 이는 중요한 선례가 되어 이후 수많은 기업가들이 그 방법을 이용했다. 삼성물산 합병 관련 재판들은 그보다 더 중요한 선례가 되어 더 큰 영향을 우리 사회에 줄 것이다. 그래서 형사 항소심 판결의 의미를 침소봉대해서는 안된다. 삼성물산 합병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듯한 인식을 남기는 것은 부정의 확산을 초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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