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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사)남북물류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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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미증유의 정치적 홍역은 시간이 문제일 뿐 일단락을 맞을 것이 분명하다. 2025년 상반기 말 이전 새로운 남북 관계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분위기와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외부 환경의 변화가 그에 걸맞은 대응을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한과의 무력 충돌을 유도해 국내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고 했던 무모한 시도는 이제 그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국내 정치적 소용돌이에 압도되어 잊고 살았던 대북 관계 설정에도 진지한 관심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현재 대남 관계를 분명하게 설정해 놓고 있다. 적대적 두 국가의 관계가 그것이다. 2023년 12월 북한은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해 이를 천명했다. 남북이 더는 동족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 통일이나 통합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상대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남남으로 살자는 것이다. 상호 적대적이긴 하지만 북한이 남북 관계를 두 국가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하나의 국가로서 남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남한을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맥락에서 연유한다. 문제는 적대적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정하고 있는 적대적 관계는 남북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두 교전국 관계’다. 더불어 '흡수통일, 체제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과의 통일은 언제 가도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출범할 한국의 새 정부는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대응의 기본 방향이 중요하다. 그래야 관계가 형성된다. 동시에 해결해야 할 과제도 알 수 있게 된다. 북한이 설정하고 있는 두 국가 관계를 남한이 무시하고 북한 체제가 없어져야만 하는 방향으로의 대북 관계 설정이 과연 바람직할까? 모든 관계는 상호적이다. 일방적일 수 없다. 일방적 관계는 지속적인 유지를 담보할 수 없다. 관계의 긍정적 발전을 도모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적대적 관계의 끝없는 유지는 우리의 선택지가 아니다. 적대적 관계를 비적대적인 관계로, 평화의 관계로 바꾸어야만 한다. 대결과 충돌을 회피하고 전쟁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관계, 상호 대등하면서도 이익이 되는 우호적인 남북 관계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북한이 설정하고 있는 대남 적대적 관계는 물론 북한이 인식하고 있는 남한의 대북 적대적 관계도 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쪽이 먼저 주도해야 할까? 단연 남한이다. 남한이 먼저 우호적 남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런 남북 관계를 우리가 원하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의 변화에는 변화를 이끄는 크고 작은 힘이 작용한다. 변화를 더 크게 원하는 쪽에서 더 큰 힘이 발휘된다. 그런 힘이 변화의 방향을 주도할 수 있다.
남북 관계의 목표를 ‘사실상의 통일’에
북한을 인정하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 제3조 영토조항에 어긋난다면 이를 우회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헌법 조항을 그대로 두면서 남북 관계를 먼저 통일과 같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상호 교류와 협력을 바탕으로 서로 가고 싶을 때 가고, 오고 싶을 때 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북한을 캄보디아나 라오스와 같이 어느 때라도 얼마든지 방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분야에서 상호 긴밀한 협력과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제도적 통일은 시간문제다. 아주 오랫동안 긍정적 남북 관계를 유지한 후 제도적인 통일을 꼭 이루어야만 한다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서로 합의하면 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북한이 남한에 대해 설정하고 있는 국가적 관계를 수용하되 필요하다면 경과법을 제정하여 새로운 남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통일부를 교류⸱협력부로 개칭하는 것도 이와 연결된 하나의 과제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이 같은 대응에 북한은 어떤 자세를 보일까? 당장은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 있겠지만 수용해 올 것이 분명하다. 북한을 대등한 관계로 인정한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는 오히려 그들이 더 강력하게 원하는 것이다. 북한이 남북한을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설정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남한과의 현격한 경제와 군사력 차이에서 비롯된 위기의식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력은 말할 것도 없이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2024년 미국 군사력 평가기관 '글로벌파이어파워(GFP)'에 의하면 남한의 군사력은 세계 145개국 중 5위를 차지했다.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 다음으로 강하다. 항간에는 북한(36위)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니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이를 충분히 감안한 평가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핵은 이를 소지한 국가의 위상과 방위적 차원에서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실제 핵 사용은 거의 불가능하다. 순식간에 상호 파멸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남한은 비록 핵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의 강력한 핵우산 아래에 있다. 북한이 남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편으로 대남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설정해 놓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남한이 북한과 두 국가 관계를 설정하고 적대적 관계를 평화적인 관계로 바꾸겠다는 것을 북한이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정치권의 여야를 막론하고 이념적 분파와 갈등 속에서도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적대적이지 않은 남북 관계, 교류와 협력이 긴밀하게 이루어지는 관계, 한반도 평화를 최우선시하는 관계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상대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만 한다. 더는 남북 관계를 이렇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남한이 자신의 주적으로 선포하고 정권 붕괴와 흡수통일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고 믿고 있는 북한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대결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한반도의 참다운 평화를 정착시키고, 교류와 협력이 대등한 남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미래. 우리가 당당히 누려야만 할 권리다.
필진 주요 이력
▷독일 브레멘대학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원 ▷통일연구원 북한경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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