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 전 국회의원](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10/21/20241021100735646770.jpg)
[이용우 전 국회의원]
반도체특별법을 둘러싼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AI 시대에 반도체산업의 중요성은 누구나 공감한다. 반도체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1)반도체기업의 R&D와 시설투자를 위해 투자세액 공제 확대와 보조금 지급 근거를 마련하고 2)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을 위한 핵심 인프라 조성을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하는 것과 함께 3)연구개발 등 특정 인력에 대해 52시간 연장 근무의 예외를 인정하는 특별연장근로제(WCE:White-Collar Exemption) 도입이 핵심이다. 트럼프 2기 출범으로 WTO 체제의 자유무역 기반이 흔들리고, 산업정책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따라서 반도체특별법이 논란이 될 이유는 크지 않아 보인다.
논란이 커지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신뢰자본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신뢰자본(Trust Capital)이란 사회적 신뢰(trust)가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요소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로버트 퍼트남 등은 신뢰가 거래 비용을 줄이고 협력과 혁신을 촉진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신뢰가 낮으면 갈등이 심화되고 경제적 비효율이 초래된다. 신뢰자본(Trust Capital)이란 개인, 조직, 사회, 국가 간 신뢰(trust)가 사회적 자본으로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요소다. 반도체특별법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신뢰자본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는 WCE, 즉 근무시간을 기준으로 업무 성과를 평가하기 어려운 고소득 전문직 및 관리직 근로자에게 근로시간 규제를 면제하고, 성과 중심의 보상을 제공하는 방안이다. 미국 1938년 공정근로기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에서 유래된 WCE나 일본의 2019년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의 핵심은 고위관리직이나 전문직 등에 대해서는 노사 합의를 전제로 근무시간 예외를 인정하고 특별한 보상을 제공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변화된 기업·노동 환경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도입될 필요가 있는 제도다. 그러나 신뢰자본이란 관점에서 보면 전혀 믿음이 형성되지 않은, 오히려 그 믿음을 깨 버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주 120시간 노동’ 발언을 했고, 이후 노동부는 주 69시간 근무를 허용하는 개편안을 발표했다. 이 시도는 당사자인 노동자의 의견과 OECD 최장 근로시간을 줄이기 위한 사회적 노력을 무시하고 일방적 밀어붙이기에 대한 반발만 낳았다. 특별연장근로제도는 한쪽에서는 '특별'에, 다른 한쪽에서는 '연장근로'에 눈길을 두는,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제도가 된 것이다. 변화된 근무 환경에 따른 근무형태에 대한 신뢰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다음으로 반도체와 같은 전략산업에 대한 정부의 세제 지원, 보조금 지급, 인프라 구축 지원을 보자.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핵심 인프라는 전력과 용수 공급이다. 2053년까지 총 10GW 이상의 전력이 필요한데 1단계로 동서발전, 남부발전, 서부발전이 각각 1GW 규모의 LNG 발전소를 건설하여 약 3GW의 전력을 공급하고, 2단계로 호남 지역에서 용인 클러스터로 연결되는 송전선로를 추가로 건설하여 전력 공급을 강화한 후 추가 소요되는 전력 지원 방안도 고려되고 있다. 아울러 하루 약 107만톤의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통합용수공급 사업 지원 방안도 마련되고 있다. 특히 정부가 1조8000억원 규모의 송전선로 지중화 비용을 분담하고, 송전선로 및 변전소 건설 사업비 2조4000억원 중 공공이 약 7000억원(약 30%), 민간이 약 1조7000억원(약 70%)을 분담하는 등 인프라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신뢰자본이라는 관점에서 정부의 지원이 합당한 것일까?
대한민국은 민주화와 선진화를 동시에 이룬 드문 사례다. 정부는 개발연대에 기업에 집중 지원해 고도성장을 이끌었지만 그 과정에서 ‘정경유착’이라는 오명도 남겼다. 개발연대에 제한된 자본을 일부 기업들에 집중적인 혜택을 주어 고도성장을 하여 오늘날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많은 기업들이 탄생하였다. 리스크가 매우 크고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사업을 시도하려는 기업가 정신이 있는 나라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경유착’이라는 오명도 얻었다. 자금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중자금을 강제 동원하여 기업에 할당한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 재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 체제의 문제점은 회사가 사업성을 따지지 않은 무리한 과잉 투자로 부실을 초래했고 이를 총체적으로 보여준 것이 IMF 위기다. IMF 위기는 대우그룹 등 많은 기업이 구조조정하였고 이런 기업들에 대출해 준 금융기관의 부실을 메우기 위해 국민의 세금인 공적자금이 투입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많은 사람의 희생과 정부 지원으로 오늘날의 우리 기업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과는 누구에게 돌아 갔을까? 주식회사는 모든 주주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회사 개편이라는 명분으로 인적·물적 분할과 합병 등 자본거래를 통해 지배주주의 지분 확대와 일반주주의 권익 침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나아가 회사를 개인 또는 집안의 것으로 여겨 이른바 '경영권 승계'에 집착하거나 지배주주(또는 경영진)의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으려는 적대적 M&A에 대해 지배주주가 잘못되면 회사가 잘못된다는 '애국심'에 호소하여 지배주주와 회사를 동일화시키고 있다. 반도체산업의 전략적 중요성을 이유로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 지배주주를 지원하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왜 삼성전자의 지배주주를 도와주워야 하지'란 의문이 나오는 것이다.
만일 삼성전자가 ‘국민기업’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일반주주의 이해를 반영하는 기업으로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라는, 신뢰자본을 가지고 있다면 정부가 지원하는 것에 많은 국민이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과연 삼성전자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어려울 때에만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닌지? 이것은 상법 제382조의 2항 이사충실의무에 대한 삼성을 비롯한 재계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조항은 민법 제681조 이사의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가 있지만 IMF 위기에 대한 반성으로 1998년 신설된 조항이다. 이것은 주주의 위임을 받은 이사가 회사의 의사 결정에서 일반주주 등의 이해를 고려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조항이 민법의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를 보충적으로 선언한 것으로 이사는 주주에 대한 의무가 없다고 판정하였다. 이사의 자본거래 의사 결정이 일반주주의 이익을 반영하지 못하게 되어 상법 개정을 통해 이 의의를 명확히 하고자 한 것이다. 이사충실의무 개정에 대해 주요 대기업의 경영진이 이 조항 개정은 기업 경영의 의사 결정의 부담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한 바 있다. 경영진이 일반투자자를 외면하고 오로지 지배주주만을 위한 의사 결정을 한다는데 이런 기업에 투자하는 투자자가 있을까? 이것이 바로 전략산업 지원에 대한 신뢰자본을 줄이는 것이 아닐까?
현재 삼성의 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 HBM 투자 의사 결정이다. HBM에서 중요한 공정 중 하나는 TC본딩이다. 이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업체는 삼성전자 설립 초기부터 협력업체였던 한미반도체이다. 삼성이 계열사를 만들어 한미반도체를 대체하는 것을 시도하면서 한미반도체 고유의 기술을 도용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한미반도체가 삼성전자에 대해 기술도용 소송을 제기하고 삼성전자가 패소하면서 한미반도체와 삼성전자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삼성이 주요 부품 조달에 있어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반도체산업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는 매년 부품업체와 비용절감(CR: Cost Reduction) 협상을 진행한다. CR은 부품업체가 생산을 계속하면서 생기는 생산효율성 증대를 완성차업체가 가져가는 것이다. 매년 이런 협상이 지속되면 부품업체는 효율성을 높이는 활동에 대한 유인이 사라진다. 효율성의 성과가 완성차업체에 이전되는 것이다. 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서 효율성을 높이나? 혁신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오죽하면 주식투자자들이 부품업체에 투자를 할 때 현대차에 대한 판매 비중을 중요한 고려 요인으로 삼을까? 현대차 납품 비중이 크면 투자자들은 눈을 돌리는 것이다. 생태계 구축보다 혼자만 살기 위한 것이다.
최근 AI산업이 화두가 되고, 이를 수행하는 데이터센터의 전력 공급이 관건이 되고 있다. 미국의 예를 보면 마이크로소프트(MS)는 AI 기술 구현을 위한 데이터센터 구축에 약 800억 달러를 투자하고, 재생에너지 개발 프로젝트에 100억 달러를 지원하는 등 전력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애플, 구글, 메타 등 다른 빅테크 기업들도 데이터센터 부지 확보와 전력 공급을 위해 자체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기업이 먼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수행하면서 정부의 지원을 요청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반도체특별법 논란에서 우리는 신뢰자본에 주목하였다. IMF 위기를 거치면서 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공적자금을 지원하고 많은 고통을 국민이 분담하였지만 돌아온 것은 고통뿐이고 이 고통을 바탕으로 다시 선 기업은 이를 잊고 성과를 독점하고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의 신뢰자본은 상실되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오로지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의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반도체특별법 논란에서 WCE를 오로지 근로시간 연장, 주 52시간 예외로 받아들여진 원인도 여기에 있다. 재계는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지금의 성과가 많은 국민의 도움을 받아 이뤄진 것임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주주를 ATM으로 취급하고 부품업체의 성과를 가져가는 데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정부 지원의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믿을 만한 기업을 만드는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무신불립(無信不立), 믿을 수 없으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국민들이 우리 기업을 믿을 수 있는 방안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 반도체특별법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믿음을 만드는 일, 이것은 기업뿐만 아니라 정치의 일이기도 하다.
이용우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 박사 ▷제21대 국회의원 ▷카카오뱅크 공동대표 ▷한국투자신탁운용 총괄 최고투자책임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