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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EPA·연합뉴스]
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서 ‘유럽 패싱’이 현실화할 조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유럽이 전쟁 종식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시사했고, 미국·러시아·우크라이나 회담 계획에서도 유럽 국가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에 유럽 정상들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곧장 대응책 마련에 나선 한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유럽이 반드시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5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우크라이나·러시아 특사는 이날 독일 뮌헨안보회의(MSC)에서 유럽은 우크라이나 평화 회담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전 협상이 실패한 이유는 너무 많은 국가가 참여했기 때문”이라며 “우리는 대규모 토론장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유럽을 배제하고 전쟁 당사자인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중재자인 미국만이 종전 회담에 참여할 것이라고 밝힌 셈이다.
당장 미국 주도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회담을 연다는 계획도 나왔다. AFP통신은 이날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가 수일 내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3자 회동을 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이번 사우디 대화에 유럽 주요국 대표들은 동참할 계획이 없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은 “미국의 이런 움직임은 유럽 국가들이 평화 협정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며 “특히 협정이 러시아에 지나치게 유리하게 보이면 이런 우려는 더 증폭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켈로그 특사는 협상안 마련 과정에서 유럽의 역할이 있을 것이며 이해관계도 반영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그는 또 “유럽의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협상 테이블 배석 여부에 대해 불평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 제안과 아이디어를 마련하고 방위비를 증액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2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한 후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협상 논의를 개시했다고 선언했다.
유럽 정상들은 켈로그 특사 발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안토니우 코스타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우크라이나와 EU가 참여하지 않는 협상은 신뢰할 수도, 성공적일 수도 없다”고 반발했다. 알렉산데르 스투브 핀란드 대통령도 “유럽인을 빼놓은 채 유럽의 안보와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논의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유럽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젤렌스키 “우크라·유럽 뺀 협정,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리 등 뒤에서 합의되거나 참여 없이 이뤄진 평화 협정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같은 규칙이 유럽 전체에 적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없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없으며 유럽 없이 유럽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며 “유럽은 협상 테이블에 있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우크라이나전 종전 국면에서 미국의 유럽 패싱 가능성이 커지자 유럽은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유럽 정상들이 긴급 회동해 우크라이나 문제와 유럽 안보 강화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마크롱 대통령의 움직임은 미국이 협상 과정을 주도하고, 미·러 간 세부 협상에서 유럽 정부들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유럽이 얼마나 큰 불안을 느끼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영국 가디언은 해석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도 미국과 유럽이 계속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면서 ‘외부의 적들’에 맞서야 할 상황에서 분열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말했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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