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기술 기업들이 중국 외 다른 지역으로 생산시설을 이전하는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17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가 보도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다국적 기업들은 중국 공급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졌다고 판단해 중국에 기반을 둔 공급업체를 다른 국가의 공급업체로 보완하는, 이른바 '중국 플러스 원' 전략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예 공장을 중국 이외 지역으로 이전하는 '중국 말고 어디든'(Anything But China·ABC)이라는 'ABC'가 새로운 원칙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코로나19 당시 중국의 엄격한 봉쇄 조치로 공장 문이 닫히자 많은 서구 기업들이 생산시설을 중국에서 베트남, 인도 등으로 이전했다. 이후 첨단 기술의 패권을 둘러싼 미-중 간 경쟁은 이러한 변화를 가속했고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복귀로 중국에서 벗어나 공급망을 다변화하라는 압박이 증가하고 있다고 WSJ은 진단했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앞서 기업들이 제품 조립만 중국 이외 지역으로 이전했던 것과 달리 현재는 센서와 인쇄 회로 기판, 전력 전자 장치와 같은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도 이전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산업에서 'ABC'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중국은 이전에는 세계 서버 생산의 가장 큰 허브 중 하나였지만, 미국이 2022년 10월 인공지능(AI) 칩의 중국 수출을 제한한 이후 AI 서버는 멕시코와 말레이시아 등에서 더 많이 조립되고 있다.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와 공급업체들도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있다.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와 램 리서치는 지난해 미 정부의 압력으로 중국 기업을 공급망에서 제외했다. 어드밴스트 에너지도 오는 7월까지 중국에 남은 마지막 공장을 폐쇄할 예정이다. 이러한 '중국 엑소더스'는 스마트폰에서 노트북에 이르기까지 소비자 기기 전반에서 걸쳐 나타나고 있다.
중국 주재 미국상공회의소의 연례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360명 중 30%는 생산 기지 이전을 고려하거나 이미 시작했다고 했고, 기술 및 연구 개발 기업의 약 4분의 1은 공급망을 이전하기 시작했다고 답했다.
서구 기술 회사가 최첨단 칩, AI 서버 및 소비자 기기의 생산 및 조립을 동남아시아로 옮기면서 해당 지역은 호황을 맞고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의 데이터에 따르면, 동남아시아에 대한 외국인 직접 투자는 2018년 1550억 달러(223조9440억원)에서 2023년 2300억 달러(332조3040억원)로 급증했다.
인피니언 테크놀로지, 인텔, 마이크론 테크놀러지 등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시설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다. 노트북 제조업체 HP는 지난 3년간 조립 기지에 태국을 추가했다.
이로 인해 말레이시아의 경우 지난해 반도체, 컴퓨터 및 기타 전자 제품 수출액이 사상 최대인 1370억 달러(약 197조9370억원)를 기록했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중국은 전 세계 거의 모든 노트북 컴퓨터를 생산했지만, 테국과 베트남에서 생산이 늘어 올해는 비중이 80%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베트남의 경우 엔비디아가 지난해 12월 연구 개발 센터 설립을 발표했다. 반도체 설계업체인 마벨도 지난 1년간 베트남에서 엔지니어 인력을 300명에서 약 470명으로 증원했고, 향후 수년간 매년 20%씩 인력을 늘릴 예정이다.
서구 고객들의 요청에 따라 많은 중국 기업들도 해외로 이전하고 있다.
중국의 데이터 센터용 광 트랜시버 제조업체인 에오프토링크는 해외 고객에 대한 공급을 늘리고 미·중 긴장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 태국 공장을 확장했으며, 노트북 컴퓨터, 태양광 패널 및 산업 기계용 납땜 재료를 생산하는 바이탈 신소재는 동남아시아와 멕시코에 자회사를 설립했다.
WSJ은 많은 기업이 중국 이외의 지역으로 이전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도 중국의 인프라와 공급업체, 노동 생태계를 따라잡을 수 있는 국가는 아직 없다고 평가했다.
시장조사기관 IDC 분석가 마리오 모랄레스는 "장기적으로 새로운 생산 라인을 만드는 것은 더 비싸고 위험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