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한국상사법학회 회장들이 이사충실의무 확대, 집중투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임 확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상법 개정안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기업 경영 혼란이 가중되고, 투자를 위축시켜 기업 가치가 크게 훼손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한국경제인협회(이하 한경협)와 한국상장회사협의회(이하 상장협)는 19일 서울 여의도 'FKI타워 컨퍼런스센터'에서 공동으로 역대 한국상사법학회 회장들과 전문가를 초청해 상법 개정 관련 긴급 좌담회를 개최했다. 1957년 창립한 한국상사법학회는 상사법(商事法) 분야 가장 오래된 학회로, 상사(商事) 법제 마련과 법원 실무에 많은 영향을 준다.
김창범 한경협 상근부회장은 개회사에서 "경제단체들은 그동안 상법 개정에 신중할 것을 수 차례 호소했지만, 이런 경제계의 절실한 목소리가 외면받고 있다"면서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이사들은 일부 주주로부터 소송과 고발에 시달릴 뿐 아니라 주요 기업의 경영권이 국내외 투기자본에 노출되고,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쓰일 소중한 자금이 경영권 방어 등을 위한 지분 매입에 소진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토론회 좌장을 맡은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주주권 보호와 증시 활성화를 위해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는 이사의 역할이나 이사회 기능을 전혀 모르는 주장"이라며 "통상적인 이사회 결의에 매번 모든 주주 이익을 보호하도록 강제한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커져 경영이 위축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상법 개정안이 회사와 이사 간 수립된 법적 위임관계를 무너뜨린다는 주장도 나왔다. 주총에서 선출된 이사는 법적 위임계약을 회사와 맺고, 이 계약에 따라 회사 대리인으로서 충실의무를 부담한다. 이는 민법상 위임의 법리(민법 제680조)를 상법이 따른 것인데, 개정안은 이런 법리를 훼손시킨다는 것이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일부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신현윤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이사가 개별주주와 직접 거래하거나 별도의 추가계약이 있거나 고의로 허위정보를 유포하는 등 사기행위를 하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주주 일반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를 부정하는 것이 세계적으로 확립된 판례이자 입법"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델라웨어주 회사법과 판례에서는 이사에게 '주주 이익 극대화'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이를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로 보기는 어렵다는 게 법조계 주장이다. 이사들의 의무가 개별주주 이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회사의 가치를 높여 궁극적으로 주주의 '단체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상법 개정이 오히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심화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선정 동국대 법학과 특임교수는 "상법개정은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기업들의 노력을 분산시키고 투자를 위축시켜 결국 기업 가치만 깎아내릴 수 있다"고 했다. 한석훈 연세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도 "명확한 근거도 없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을 기업 지배구조에서 찾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자산 2조원 이상 대규모 상장회사에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면 경영 효율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나왔다. 최준선 교수는 "멕시코ㆍ칠레를 제외한 OECD 회원국 중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나라는 없고 일본도 과거 집중표제를 의무화했다가 주주 간 파벌싸움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1974년 이를 회사 자율에 맡겼다"면서 "감사위원 선출시 대주주 의결권을 3%만 허용하는데, 이러한 의결권 제한 역시 해외 입법례를 찾기 어렵고, 헌법에서 보호하는 국민의 재산권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특히 국회 상법 개정안은 감사위원 분리선임 인원을 현행 1명에서 2명 이상으로 확대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이사회의 효율성과 신속한 의사결정, 나아가 기업 밸류업과 주주 보호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한석훈 교수는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하다. 한 교수는 "상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한국 기업은 경영권 위협에 더 많이 노출될 수 있다"면서 "상법 개정으로 경영권 공격 수단이 더 늘어나 지배구조가 안정된 대규모 상장회사도 헤지펀드나 행동주의펀드의 공격 위험에 노출될 수 있고 이는 결국 헤지펀드의 단기차익만 올려주는 역효과를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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