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특별법 제정안이 8개월째 공회전하며 골든타임만 흘려보내고 있다. 최근 연구·개발(R&D) 인력에 한해 주52시간 근로제 적용을 제외하는 내용이 포함된 반도체법을 두고 정부와 여야 대표가 모처럼 머리를 맞댔으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또 빈손으로 돌아갔다. 기업에서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이대로 가다가는 산업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경고음이 커지는 이유다.
기업들은 현재 상태로는 반도체 산업의 미래 대비는커녕 기존 경쟁력마저 잃을 수 있다고 토로한다. 반도체 개발은 수없이 반복되는 실험과 실패 그리고 긴 검증 과정을 수반하는 고도의 기술 집약적 작업이다. 그러나 현행 주52시간 근로제가 R&D 인력의 집중 근무를 저해하고 있고, 충분한 시간과 유연한 업무 환경 없이는 혁신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다. 업계 관계자는 “52시간이라는 족쇄로 인해 결정적인 순간에 핵심 인력이 부재한 상황도 나오고 이에 의사 결정에 큰 차질이 생긴다”며 “정부의 미온적 대응과 과도한 노동 제한이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이도 저도 못하고 시간만 흘려 보내는 사이, 미국과 대만 등 주요 반도체 강국들은 정부 주도의 대규모 지원과 유연한 근무환경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투자와 기술 개발을 진행 중이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 자립을 위해 칩스법 등을 통해 수십조원 규모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등 글로벌 기업들이 미국 내 신규 공장 건설과 기존 시설 확장에 적극 투자하도록 압박하며 시장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견지하고 있다.
중국은 반도체 자급률 향상을 목표로 국가 지원 펀드를 마련하고 첨단 메모리 및 AI 칩 등 핵심 기술 개발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도 중국 기업들이 빠르게 기술을 추격하며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첨단 패키징 외 다른 모든 분야에서 우위를 유지해왔다는 기존 평가마저 도전을 받고 있다. 일본은 민관 협력을 통해 차세대 반도체 장비 및 제조 기술 개발에 투자를 확대해 자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시장에선 대만 TSMC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타이틀을 거머쥔 결정적인 계기는 R&D 인력을 24시간 3교대로 돌리는 ‘나이트 호크 프로젝트’ 덕분이라고 평가한다. 미국 엔비디아도 업무 강도가 세기로 이미 정평이 나있다. 이 회사의 한 직원은 업무 환경을 ‘압력솥’에 비유하며 회의에서는 소리치며 싸우는 일도 잦았다고 했다. 이를 두고 엔비디아의 공동 창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젠슨 황은 CBS와의 인터뷰에서 “특별한 일을 하고 싶다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직원들을 열심히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국·중국·대만·일본 등 경쟁국들이 조 단위의 지원과 유연한 노동 환경을 무기로 반도체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 가운데, 한국은 정부의 미온적 대응과 과도한 근로제한으로 미래 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산업계의 경고에 귀 기울여, 혁신적이고 유연한 근무 환경 조성과 함께 실질적 재정 지원 방안을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 향후 한국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도적 유연성을 확보하고 국제 투자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과감한 정책 개혁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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