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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 없는 집 설계
유난히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많은 중, 설 연휴에 용산에 있는 국립한글박물관에 화재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철렁 가라앉게 했다. 다행히 화재는 6시간 40분 만에 진화되고 소장 유물도 큰 피해 없이 안전하다는 소식이 전해져 안도할 수 있었다. 화재 진압 후 박물관 증축 공사를 하다 용접 중에 불씨가 튀어 화재로 번졌다는 화재 원인을 듣고는 언 듯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사는 이미 지난해 10월 박물관을 휴관하고 ‘국립한글박물관 교육공간 조성 및 증축 공사’를 시작해 올해 10월 준공을 목표로 공사 중이었다고 한다.한글박물관은 원래 한글문화원으로 검토되었던 것을 2009년 이명박 대통령 시절 1만 1322㎡(약 3400여평) 규모로 공사를 시작해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로 2014년 한글날에 개관한 건물이다. 그런데 불과 개관한지 10년 남짓한 박물관을 증축하다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선 건축주인 문화관광체육부가 더욱 촘촘하게 박물관의 비전(Vision)과 임무(Mission)를 고려해서 공간을 구획하고 건축가에게 설계에 반영을 요구했다면 10여 년 만에 증개축 공사가 필요했을까라는 점이다. 원래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설계 할 경우 방문객을 위한 공용공간과 전시 공간, 교육 공간, 수장고 및 보존처리실, 사무실, 연구실, 편의 및 상업시설을 구분해 동선을 고려해서 공간을 배치하고 구획하는 것은 상식이다. 또한 방문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화재 시 유물에 피해가 없는 방화 시스템, 관람객과 소장품 보호를 위한 CCTV와 경보 시스템 등 보안, 작품 보존은 물론 전시물을 보다 부드럽고 섬세하게 보여줄 수 있는 조명장치, 작품 보존을 위한 온도와 습도제어 시스템, 공기의 질을 관리하고 조절하는 시스템은 필수적이다. 여기에 방문객의 이동과 관람을 위한 자연스러운 동선에 대한 배려와 미술관, 박물관에서 일하는 이들이 편리하게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은 매우 중요하다. 아울러 장애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설계도 필요하다. 또한 전시실의 울림이나 공명을 고려한 음향학적 설계도 중요하다.
박물관학(Museology)에서는 미술관 박물관의 증개축을 포함해서 시설 개보수를 10~15년마다 검토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글박물관의 증축 공사는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교육 공간 조성 및 증축’ 공사 내용을 보면 “특화된 한글문화 체험 교육 공간 조성과 업무공간 확대를 위해 기존건물의 중정(175㎡, 약 53평)을 활용해 1층을 특화된 한글문화 체험 교육 공간으로 조성하고, 직통계단을 추가로 만들어 이동 편의를 도모하며, 관람객을 위한 휴게공간 등을 조성할 예정이고, 4층에 업무공간을 증축한다”는 것이다. 이는 2014년 개관 이후 2015년 대비 2024년도 한글문화 체험 교육 참가자가 2.6배 증가하고 직원 수도 2.3배 증가하는 등 기관의 역할이 늘어나면서 교육 공간 및 업무공간, 편의시설이 부족해 증축하게 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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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가 건축주?
숨 가쁘게 박물관설립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계획을 수립하면서 건축주인 문화관광부는 한글박물관이란 명칭과 매우 추상적인 설립 목적과 대지면적과 건축면적, 연면적 그리고 건축비 정도만 설계공모지침에 명시하고 이에 '"박물관을 건축할 때 ‘친환경건축물 인증’, ‘건물에너지효율 1등급 인증’, 사회적 약자와 장애인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하는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Barrier Free)인증’을 설계 단계부터 반영”하는 정도의 현상 공모안을 내걸었다.박물관이나 미술관 건립을 위해서는 우선 그 목적과 사명 그리고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분명히 한 다음 교육, 연구, 보존, 관객 등을 고려하는 것이 원칙이다. 또 주 관람객은 누구일지 박물관이 다룰 내용 즉 콘텐츠는 예술품인지 아니면 역사적 유물 또는 과학적인 기구인지 먼저 정해야 이에 맞는 건축이나 운영계획 수립이 가능하다.
유물수집계획과 유물수집예산 여기에 건립과 운영을 위한 재정 계획 즉 설립과 개관까지 필요한 설계, 건축비 그리고 개관 후 연간 운영비에 대한 검토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를 마련할 방법으로 국고, 기부, 자체예산 등의 검토도 중요하다. 또 기관운영을 위한 거버넌스(Governance)와 전문인력을 포함한 직원의 고용 및 교육 계획, 지속 가능한 운영을 위한 안정적인 재원 확보와 효율적인 조직 관리 그리고 설립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연간운영비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건축물의 규모와 용도 그리고 시설 배치가 되어야 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건축주로서 건축가에게 요청할 설계지침은 ‘건립기본계획수립 및 타당성조사용역’을 주어 이상의 제 요소들을 연구하도록 해서 해결하고 있지만, 문제는 거의 모든 연구보고서가 매우 형식적이며 추상적이며 개념적이란 것이다. 게다가 연구자 대부분이 박물관학을 전공한 이나 박물관이나 미술관 현장에서 일하고 잔뼈가 굵은 전문가 즉 학예연구원이나 작품관리, 보존전문가, 박물관 교육전문가, 전시디자이너등은 배제된 채 연구실 책상에서 주로 이론적으로 공부한 학자나 연구자들로 구성되어 현실적이며, 현장의 변화된 새로운 개념이나 방법론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정작 박물관에서 일할 사용자는 연구과정은 물론 설계과정에서도 배제되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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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책상머리에서 상상한 뜬구름 잡는 ‘설립기본계획’은 건축을 위한 설계 단계로 이어진다. 건축설계는 대개 ‘기획설계(Conceptual Design)’, ‘계획설계(Schematic design)’, ‘기본설계(Design Development)’, ‘실시설계(Construction Document)’로 나뉘어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공공건축 설계에서 건축주의 요구 즉 가능성과 현실성 그리고 건축가의 스타일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획설계’ 단계는 아예 생략된 채 바로 ‘계획설계’로 넘어간다. 계획설계 단계에서 건축주와 건축가 아니 건축사와 많은 토론과 요구를 통해 기획설계에 대한 수정과 보완이 필요하다. 특히 이 단계에서 대지를 포함한 건축에 필요한 총예산을 추정하고, 항목별 비용을 산출하며, 박물관 운영에 관한 주요 전략과 방법 즉 티켓 판매, 전시 관리, 마케팅 전략 등을 함께 논의해 운영에 필요한 직종과 직원의 역할과 숫자를 파악해 사무 및 작업공간을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계획설계 단계에서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누구하고 의논할지에 모호하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건축가가 아닌 건축사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법률 구조 때문이다. 우리나라 건축법상 건축가는 건물의 형태와 기능, 그리고 미학적인 부분까지 고려해 디자인하는 전문가지만 건축물의 안정성과 법적 준수 사항을 책임지며, 잘못된 설계나 공사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은 건축사다.
이렇게 책임없는 건축가와 책임을 지는 건축사의 가장 큰 차이는 ‘자격증’ 여부와 ‘법적 권한’이다. 건축가는 창의적 디자인과 설계를 담당하는 전문가지만 자격증이 필요 없고, 법적으로 설계 도면을 제출하거나 감리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 반면, 건축사는 국가 자격증을 취득해 이런 법적 권한을 지니며, 설계와 감리 업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건축은 건축사의 책임하에 이루어지는데 과연 박물관 건축의 첫 단계인 계획설계 단계에서는 누구하고 이런 문제를 의논하고 요청하며 검토할 것인가는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행정문서 상으로는 건축가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추후 시간이 지난 설계자를 찾아보면 건축사 이름만 남아 결과적으로 건축주만 없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도 없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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