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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종로에 있는 조계사 뒷길의 일방통행이 시작되는 진입로 입구에는 tvN 인기프로그램 ‘유키즈’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홍보하는 곰탕가게가 있다. 검색해보니 2020년도 영상이었다. 기존 곰탕에 한약재로 기운을 더욱 보강했다는 한우국밥집이다. 광평대군 17대손 한의사가 개발한 식법을 3대째 잇고 있다는 추가설명이 뒤따랐다. 상호인 ‘이여’가 광평대군(廣平大君)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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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수서동 필경재]
원조도 확인할 겸 이 달의 답사코스 삼아 대군의 종가인 ‘필경재(必敬齋)’를 찾았다. 종가(宗家)라기보다는 500년 역사를 지닌 왕가(王家)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한 때는 99칸이었으나 현재는 40여칸이 남아있는 큰 미음(ㅁ)자 형태의 한옥이다. 강남구 전통건조물 제1호로 지정될 만큼 그 가치와 위상이 지역사회에서 으뜸이라 하겠다.
종가는 ‘봉제사(奉祭祀 제사를 모심) 접빈객(接賓客 손님맞이)’이 일상사다. 이 두가지 일을 원만히 하려면 상차림은 기본이다. 대대로 손물림되는 전통음식은 이 가문의 또다른 긍지였다. 그 왕가음식을 집안사람 뿐만 아니라 세상사람에게 선보인 것은 1999년도 이후의 일이다. 그 무렵 국위선양을 위한 갖가지 국제행사가 붐을 이루었다. 그리고 ‘강남’이라는 상징적인 위치와 함께 제대로 격을 갖춘 한옥이 주는 매력이 더해진 결과였다. 정부관계자와 종친들 그리고 주변 지인들의 거듭되는 요청에 따라 ‘왕손’으로서 사명감과 의무감을 도저히 저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전통음식점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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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 허목선생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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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 허목선생 글씨]
집 안의 정원에 신도비(神道碑 고인의 행적을 적은 비석)가 있고 담장 넘어 바로 묘역이 있는 독특한 공간배치가 사람들을 오게 만드는 매력이다. 주거문화와 음식문화 그리고 묘지문화가 어우러진 까닭에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독특한 공간구조를 자랑했다. ‘이호당(二護堂)’은 가문의 명예와 전통 두 가지를 온전히 지킨다는 의지가 반영된 현판이었다. 주련도 예사롭지 않다. 조선제일의 명필이라는 석봉 한호(石峰 韓濩 1543~1605)선생과 전서(篆書)의 대가인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 선생의 이름자를 만날 수 있었다. 석봉 선생은 밤중에 호롱불을 끄고서 어머니의 떡썰기와 자신의 글쓰기가 대결한 일화로 유명하다. 미수 선생은 강원도 삼척부사 시절에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세운 이래로 동해안 해일이 없어졌다는 전설적인 글씨체를 자랑하는 인물이다.
오백년 동안 한 자리에서 종가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덕을 많이 쌓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구성원들의 좌우명인 ‘겸손’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옥호 ‘필경재(必敬齋)’는 건립 당시에 지어진 이름이다. 항상 주변인을 공경하라는 가훈이었다. 남을 공경하려면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자연히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누구라도 이 집안을 편안하게 부담없이 드나들 수 있는 문화를 가꾸어 나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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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계단과 열린 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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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평대군 묘역]
하지만 본래 무덤자리는 여기가 아니였다.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 자리였다. 왕자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왕까지 이길 수는 없다. 왕릉터로 지정되면서 왕자묘는 당연히 옮겨가야 했다. 하지만 이장한 자리가 원래 터보다도 훨씬 더 나은 명당이었다. 왜냐하면 혼자만의 안택이 아니라 후손들까지 함께 할 수 있는 크고 넓고 복된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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