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필경재(必敬齋)-항상 주변사람을 배려하며 사는 집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원철 스님
입력 2025-02-24 14:56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원철 스님
[원철 스님]


종로에 있는 조계사 뒷길의 일방통행이 시작되는 진입로 입구에는 tvN 인기프로그램 ‘유키즈’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홍보하는 곰탕가게가 있다. 검색해보니 2020년도 영상이었다. 기존 곰탕에 한약재로 기운을 더욱 보강했다는 한우국밥집이다. 광평대군 17대손 한의사가 개발한 식법을 3대째 잇고 있다는 추가설명이 뒤따랐다. 상호인 ‘이여’가 광평대군(廣平大君)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남구 수서동 필경재
[강남구 수서동 필경재]
 
원조도 확인할 겸 이 달의 답사코스 삼아 대군의 종가인 ‘필경재(必敬齋)’를 찾았다. 종가(宗家)라기보다는 500년 역사를 지닌 왕가(王家)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한 때는 99칸이었으나 현재는 40여칸이 남아있는 큰 미음(ㅁ)자 형태의 한옥이다. 강남구 전통건조물 제1호로 지정될 만큼 그 가치와 위상이 지역사회에서 으뜸이라 하겠다.
 
종가는 ‘봉제사(奉祭祀 제사를 모심) 접빈객(接賓客 손님맞이)’이 일상사다. 이 두가지 일을 원만히 하려면 상차림은 기본이다. 대대로 손물림되는 전통음식은 이 가문의 또다른 긍지였다. 그 왕가음식을 집안사람 뿐만 아니라 세상사람에게 선보인 것은 1999년도 이후의 일이다. 그 무렵 국위선양을 위한 갖가지 국제행사가 붐을 이루었다. 그리고 ‘강남’이라는 상징적인 위치와 함께 제대로 격을 갖춘 한옥이 주는 매력이 더해진 결과였다. 정부관계자와 종친들 그리고 주변 지인들의 거듭되는 요청에 따라 ‘왕손’으로서 사명감과 의무감을 도저히 저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전통음식점은 열렸다.
 
바깥양반은 이미 장보기의 달인이었다.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백명이 참석하는 제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일년내내 찾아오는 전주이씨 씨족들의 공양 뒷바라지에 안주인 역시 ‘음식달인’의 경지에 올랐다. 두 어른의 공덕에 힘입어 답사객 일행들과 함께 궁중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밥상머리에 앉으니 손님들이 꼽은 최고의 음식이라는 보쌈김치가 제일 먼저 나왔다. 식사 후 정원을 거닐 때 만난 한 무리의 손님들은 일본인 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을 찾은 외국인 손님이 식당 전체 방문객의 80%를 차지한다고 했다. 한국 전통음식의 양대기둥인 종가음식과 사찰음식은 오늘도 열심히 국위를 선양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한석봉 허목선생 글씨
[한석봉 허목선생 글씨]
한석봉 허목선생 글씨
[한석봉 허목선생 글씨]
 
집 안의 정원에 신도비(神道碑 고인의 행적을 적은 비석)가 있고 담장 넘어 바로 묘역이 있는 독특한 공간배치가 사람들을 오게 만드는 매력이다. 주거문화와 음식문화 그리고 묘지문화가 어우러진 까닭에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독특한 공간구조를 자랑했다. ‘이호당(二護堂)’은 가문의 명예와 전통 두 가지를 온전히 지킨다는 의지가 반영된 현판이었다. 주련도 예사롭지 않다. 조선제일의 명필이라는 석봉 한호(石峰 韓濩 1543~1605)선생과 전서(篆書)의 대가인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 선생의 이름자를 만날 수 있었다. 석봉 선생은 밤중에 호롱불을 끄고서 어머니의 떡썰기와 자신의 글쓰기가 대결한 일화로 유명하다. 미수 선생은 강원도 삼척부사 시절에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세운 이래로 동해안 해일이 없어졌다는 전설적인 글씨체를 자랑하는 인물이다.
 
오백년 동안 한 자리에서 종가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덕을 많이 쌓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구성원들의 좌우명인 ‘겸손’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옥호 ‘필경재(必敬齋)’는 건립 당시에 지어진 이름이다. 항상 주변인을 공경하라는 가훈이었다. 남을 공경하려면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자연히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누구라도 이 집안을 편안하게 부담없이 드나들 수 있는 문화를 가꾸어 나갔을 것이다.
 
묘역 계단과 열린 철문
[묘역 계단과 열린 철문]
그 영향 때문인지 왕가의 묘역임에도 불구하고 출입이 까다롭지 않았다. 왕릉을 찾을 때마다 눈에 거슬리던 CC TV도 보이지 않았다. 또 필요이상으로 가까이 접근하면 경고음과 함께 출입을 금한다는 방송이 나오는 다른 왕릉을 찾았을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장면등과 비석까지 볼 수 있는 위치까지 접근을 허락하는 넉넉함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친절하게도 구역구역마다 만들어놓은 계단과 능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 친 철책에는 한 켠의 작은 철문은 열려 있었다. 그 자체로 찾는 이들을 배려한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묘역과 묘역을 이어주는 골짜기 개천에는 어김없이 자연석으로 만든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13만평 부지는 왕자 사대부 등 칠백여명의 광평대군파 식구들이 함께 어우러진 묘지 박물관이었다. 태종 이방원 시대에 일어났던 제1차 왕자의 난에 희생된 이방번(李芳蕃)의 묘도 보였다.
 
광평대군 묘역
[광평대군 묘역]
광평대군은 세종대왕의 다섯 번 째 아들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왕자들에 대한 기사 가운데 그 내용이 가장 길며 매우 긍정적인 내용으로 빼곡하다. 하지만 그는 20살에 요절했다. 그의 아들도 30살에 사망했다. 왕자로써 누려야 할 복을 후손에게 넘긴 탓인지 이후 그들의 자손은 대대손손 번창했고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로써 가문은 날로 융성했다. 당시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두 왕자의 비(妃)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고 수행했던 견성사(見性寺)는 뒷날 강남 봉은사(奉恩寺)의 전신이 되었다. 아마도 대를 이은 두 왕비의 기도 힘도 가문의 창성에 커다란 몫을 했을 것이다.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전국 비구니 회관’ 도로명 주소가 ‘광평로’인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본래 무덤자리는 여기가 아니였다.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 자리였다. 왕자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왕까지 이길 수는 없다. 왕릉터로 지정되면서 왕자묘는 당연히 옮겨가야 했다. 하지만 이장한 자리가 원래 터보다도 훨씬 더 나은 명당이었다. 왜냐하면 혼자만의 안택이 아니라 후손들까지 함께 할 수 있는 크고 넓고 복된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