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종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교수]
민족주의 부활 시대의 공공외교
지난주에는 오늘날 신냉전 시대 세계 정세가 얼마나 각박하고 험악해졌는지를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백악관에서 있었던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의 정상회담 자리에서였다. 양국 간 광물 개발 협정을 통해서 3년 된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려던 자리는 양 정상 간 가시 돋친 설전으로 시작되어 격앙된 분위기로 상대를 공격하는 최악의 싸움터가 되고 말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지원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 없이 전쟁을 계속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이 침략국 러시아의 푸틴을 두둔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전쟁을 끝내려 한다고 맞받아쳤다.
국가 간 외교 관계에서는 가히 보기 드문 난타전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냉전이 끝난 후 30여 년간 세계는 나름대로 질서와 상식이 통하는 시대였다. 국경과 주권을 존중하고 상호 협력의 바탕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대국이 소국을 함부로 침범하고 유린하는 것은 금기시되었고 국제 기구는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해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은 소위 골든 아치 룰(Golden Arch Rule)이라는 원칙을 주장하며 골든 아치로 상징되는 맥도널드가 진출하고 있는 나라끼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낙관론을 편 바 있다.
이 모든 장밋빛 낙관론은 지난 10여 년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2012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략 및 합병이 그 시초라고 볼 수 있다. 과거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푸틴은 무력으로 이를 이루고자 했다. 중국의 시진핑 역시 서구 열강들의 침략으로 치욕을 겪었던 최근 역사를 뒤로하고 지난 수천 년간 미들킹덤으로 위세를 떨치던 중국의 모습을 되찾고자 매진했다. 이 과정에서 냉전 후 확산되던 이상주의적 자유주의 세계관은 차츰 퇴색하고 냉혹한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국제 질서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서방 진영에서도 국제적 연대를 통한 공동 번영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최고로 여기는 대중 영합적 민족주의 성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2016년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면서 국제주의는 크게 도전을 받았다. 과거 양차 대전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고 평화롭고 개방된 유럽을 구축하자는 이상이 시련을 겪게 된 것이다. 같은 해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극우 대중 영합주의에 편승하여 트럼프가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난다. 텔레비전 리얼리티 쇼를 통해 인기를 얻은 이 정치 초년생은 미국 우선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기존의 세계 질서를 부정하고 미국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새로운 질서를 약속하며 권좌에 올랐다. 동맹국과의 협력도 미국 이익에 반한다면 미련 없이 저버리고 미국에 도움이 된다면 독재자와도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트럼프의 권좌 복귀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있다. 트럼프 2기는 1기보다 훨씬 더 극우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웃이며 오랜 우방인 캐나다와 멕시코에 25% 관세를 부과하고 유럽 국가에 대해서도 높은 관세로 위협하고 있다.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를 접수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야욕도 감추지 않는다. 유럽의 동맹국들에는 국방비를 대폭 증대하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고 반면 러시아 푸틴에 대해서는 갈수록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번에 문제가 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파국도 결과적으로 푸틴의 침략을 용인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약육강식의 현실주의적 국제 질서가 도래하는 와중에 대학에서 국가의 소프트파워와 공공외교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필자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공공외교라는 분야는 물론 오랜 역사가 있지만 이것이 지난 30여 년간 국제적인 추세로 부상하게 된 것은 냉전 후 자유주의 국제 질서 확산에 기인한다. 국가 간 상생을 위해 선의로 협력하고 윈윈(win-win)을 이루자는 것이 공공외교의 기본 철학인 만큼 이것이 갈수록 현실세계에서 외면받는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미국의 대표적인 공공외교 정책 및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있다. 전 세계의 빈곤, 질병, 기아 등을 해결하기 위해 케네디 대통령 시절 설립된 미국의 국제개발처(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의 폐기가 그중 하나이다. 이 밖에도 트럼프는 해외 원조 및 협력 프로그램을 대폭 축소 혹은 중지시키고 있다. 이 모든 공공외교 프로그램들은 과거 추악한 미국인(Ugly American)이라는 오명을 벗고 선량한 미국인과 미국의 모습을 보여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얻고 친구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지난주 젤렌스키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인들에게 텔레비전을 통해 보여준 모습은 선량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뉴노멀(new normal)이라면 세계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