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차별적 관세 폭탄을 수시로 터트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세계 경제 질서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워졌다. 글로벌 슈퍼파워를 앞세워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일명 '트럼프 룰(Trump rule)'이 세계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한국 경제에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이런 환경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입 비율이 89%나 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최근 아주경제신문과 만난 이시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은 "국제 질서의 구조적 전환과 AI(인공지능) 등 기술을 둘러싼 패권 경쟁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대전환의 시대가 왔다"며 "특히 한국은 수출 중에서도 미·중 의존도가 40%를 넘는 만큼, 양강 패권 경쟁이라는 큰 틀 아래 기회와 위기 요인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산지 이전 요구하는 美..."韓 산업 구조변혁기로 삼아야"
이 원장은 '트럼프 2기'의 관세 정책이 1기 때보다 더 정교해졌다고 진단했다. 1기 때는 대중 견제를 통한 미국의 무역 적자 해소가 정책의 주된 목적이었다면 이번에는 여기에 관세를 주요 재정 수입원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이 더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수출 품목 톱 3위(반도체·자동차·석유철강)에 대한 미국의 견제는 위기다. 특히 자동차는 전체 수출에서 북미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60%에 육박하는 만큼 치명적이다.
이 원장은 "트럼프의 자동차 관세 정책 근본 취지는 한국에 대한 무역적자 해소보다 기업 법인세 및 개인 소득세 인하 등 각종 감세 정책의 추진 동력과 관련이 있다"면서 "자동차, 반도체 등 굵직한 산업의 관세는 미국 정부의 재정 충당 문제와 밀착됐기 때문에 한국이 개별 협상을 통해 예외적인 조치를 받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봤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문이다. 이 원장은 "자동차는 선거 과정에서도 드러났듯 트럼프에게도, 또 미국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상징성이 높은 산업"이라면서 "4월께 철강, 알루미늄에 때린 25% 이상의 매우 강력한 자동차 관세 정책에 나올 수 있고, 정부는 이에 대비해 세밀하게 전략을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럽, 중국 등에 이어 베트남이 미국의 추가 타깃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준비해야 한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베트남 진출 한국 기업은 8700여 개에 달한다. 베트남의 지난해 대미수출액은 전년동기대비 18% 늘어난 1100억 달러(대외경제정책연구원)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 원장은 "중국이 미국을 우회 진출하는 경로로 멕시코와 대만 다음으로 많이 이용한 국가가 베트남"이라며 "트럼프 1기 이후에 중국의 대미 간접 수출 비중이 가장 많이 늘어난 곳이 베트남이기 때문에 멕시코, 캐나다, 중국 등처럼 베트남에도 국제비상경제권법(IEEPA) 등을 통해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때문에 국내 기업의 공급망 다변화가 절실한 상황이다. 이 원장은 "트럼프가 촉발하긴 했지만 앞으로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기조는 더 강화될 것이고 이로 인해 공급망의 분절화는 전반적인 세계화의 흐름으로 굳어질 것"이라면서 "수출 중심의 기업들은 이에 대해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한국 경제의 위기 원인을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한 '보호 무역주의'에서만 찾으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지난 20년간 산업 구조나 주력 상품이 크게 변하지 않으면서 반도체·자동차·철강 등 소수 업종이 경제를 끌어가는 고착화된 흐름이 지속됐다"면서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새로운 기술의 흐름을 포착하는 데 소홀했던 결과가 지금의 위기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 내 생산기지 이전을 강하게 요구하는 트럼프 2기 정부가 오히려 한국의 이런 산업적 구조 전환을 촉발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며 "상품뿐 아니라 인력, 기술, 서비스 등 다양한 영역에서 구조적 변화의 기회를 포착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한다면 미래 시점에서 봤을 땐 지금의 위기가 오히려 한국에게는 굉장한 기회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통상환경이 격해질수록 전략적 조언을 해주는 대외정책연구원의 역할은 더 중요하다. 그는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 핵심 산업을 이끄는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선 앞으로 미국에 직접 투자를 늘릴 수밖에 없을 텐데 이를 자본 유출로만 보지 않고 국내 경제와 연결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상품 수출뿐 아니라 서비스, 기술, 인력, 자본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연결해 세계화의 흐름이 어떻게 국내 산업과 양질의 연결성을 갖출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령 해외 인재는 어떤 방식으로 유치하는지 또 국내 기업들의 미국 내 투자를 어떻게 내수와 연결해 낙수효과를 높일 수 있을지 등 다양한 현상의 연결성을 질적으로 고도화하는 게 통상전략 연구가들의 역할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아직 탄핵 정국으로 불확실성이 높고, 한국이 활용할 카드가 적다는 점은 우려다. 이 원장은 "한국은 보편·상호 관세 시 즉각 보복하겠다고 경고한 유럽, 중국과 달리 대외 의존도가 높고, 방위 측면에서도 대미 의존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리스크가 큰 상황"이라며 "미국에 협조하면서도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산업, 기술 협력 등의 기회를 가져온 일본의 협상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미국이 경제 군사적으로 대중 견제를 강화하려면 반도체, 조선, 원자력 등 한국이 협력할 분야가 많다"면서 "트럼프 시대는 이들 분야의 기술을 발전시키고 한국이 시장을 더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위기 속에서도 한미가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기술 협의를 통해 각 산업에 미치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기회는 극대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대처"라고 조언했다.
그는 트럼프 2기 통상정책의 분수령을 내년 11월 미국 의회 중간선거 이후로 봤다. 이 원장은 "트럼프 1기와 달리 관세 정책이 동시다발적으로 빠르게 현실에 반영되면서 생활 물가가 굉장히 자극받는 상황"이라며 "관세는 소득, 계층을 따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부과되는 세금이라는 점에서 특히 저소득층의 생활물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또 "이(관세) 정책은 미국 거시지표가 인플레이션을 가리킨다면 지금처럼 공격적으로 지속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중 견제에 대한 방향은 견고하기 때문에 한국의 통상전략은 이를 간과해선 안된다는 게 그의 견해다. 이 원장은 "트럼프 2기 정부 핵심 인사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대중 강경론자라는 점"이라면서 "앞으로 통상 질서는 자국 우선주의를 기반으로 한 미·중 패권 경쟁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이 과정은 과거의 냉전처럼 이분법적 갈등이 아닌 다앙한 국가와의 경쟁, 또 협력과 갈등 속에서 복합적인 합종연횡을 의미하며, 국내 기업들은 이런 다양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미래 세대 위한다면 기업이 역동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환경 구축해야"
이 원장은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에서 역동적으로 뛰어 놀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은 해외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관세, 산업지원금, 법인세 인하 등 '채찍과 당근'을 병행하고 있는데 한국은 매우 안일하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내 미국 내 생산공장, 기업에 대한 법인세 최고세율을 최대 15%까지 낮추겠다고 약속했다. 현실화되면 한국의 현행 법인세(24%)와 9%포인트까지 격차가 벌어진다.
그는 "국내 기업이 미국에 투자를 늘려서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왜 기업들이 한국에 투자하길 주저하는지 따져봐야 한다"며 "전통산업은 후퇴하고 노동력을 줄어드는데 각종 규제는 늘고 기업 법인세율도 미국과 단순 비교하면 너무 높다보니 기업 입장에서는 수익성이 갈수록 떨어지는 한국 시장에 투자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기업들이 중장기적인 투자를 지속할 수 있도록 경영 허들을 낮춰 국내 기업은 물론 해외 기업들에게도 한국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면서 "좀 더 역동적인 경제, 개방적인 경제 구조를 통해 기업 운영에 활력을 불어넣어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원장은 국제 정세가 복잡해지면서 "앞으로 통상 대응을 넘어 통상 기획을 할 수 있는 시대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정부와 다양한 국책연구기관의 수시소통 채널도 구축했다. 올 연말 대중 정책에 대한 전략 보고서도 기대를 모은다.
이 원장은 "한국은 여전히 중국을 개도국으로만 이해하려는 과거의 시점에 머물러 있다"며 ""과거의 관점만 고집하면 새로운 통상 질서를 세울 수 없다"고 했다. 또 "미·중 갈등 속 새로운 기술 패권을 가진 중국을 인정하고, 또 중국 의존적인 공급망 리스크 분석을 통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면서 "올 연말께 해당 연구 결과가 나오면 새로운 관점 안에서 대중 통상전략을 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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