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재혁 칼럼니스트]
中에 쫓기는 韓 반도체, 주 52시간에 발 묶였다 / '반도체 린치핀', 한국의 위기 / 기약 없는 '반도체 특별법' - "골든타임 놓치면 미래 없다." / 올 반도체 업계 최대 위협은 '美관세' / 메모리 반도체, 너마저 - 중국이 기초역량 추월 / 벼랑 끝 몰린 K-반도체 ... '초격차' 긍지 어디갔나 / 일본 반도체 드림팀 - 법까지 바꿔 돕는다
지난 2월 하순 몇몇 신문에서 반도체 관련 기사와 사설 제목들을 추려 보니 위와 같았다. 하나같이 한국경제를 이끌어가는 반도체에 대한 걱정과 경고 일색이다.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프는 관세 협박 카드로 목을 죄어 오고 후발주자 중국은 기술 굴기를 이루며 반도체 대부분의 기초역량에서 우리를 따라잡았다. 잠자고 있던 일본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며 반도체 부활 총력전에 나섰다. 글로벌 패권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반도체는 국가대항전으로 변하고 있다.
한달 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부당합병 및 회계부정 의혹 재판에서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2016년부터 장장 9년을 끌어 온 이 회장의 사법리스크는 고스란히 삼성의 경영리스크가 되어 왔다.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 반도체 대응에 뒤쳐져 위기에 빠진 것도 파운드리 사업이 부진한 것도 거함을 진두지휘하며 적시에 결단을 내려야 할 이재용 회장의 발목을 잡은 사법리스크 탓이 컸다.
반도체가 흔들리면 나라 경제가 흔들린다. 삼성의 위기는 한국경제의 위기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검사 시절 이 사건의 수사와 기소를 주도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이재용 회장의 2심 무죄 판결 이후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국민께 사과드린다"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회장에 대한 수사가 무리였음을 사실상 시인한 것이라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상고해도 결론이 바뀔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었다. 그럼에도 검찰은 기어이 대법원 상고를 결행했다. 이재용 회장의 사법리스크는 온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책임경영을 위한 등기임원 복귀도 불발됐다.
서진(西晉) 초기 사람 손초(孫楚)는 글재주가 매우 뛰어났으나 남을 우습게 보고 성격이 오만한 재승덕박(才勝德薄)형 인재였다. 후한말부터 계속된 전란과 살상에 지쳐 당시 사대부 간에는 세상 일에 초연하면서 노장(老莊)의 철리(哲理)를 담론하는 이른바 청담(清談)이 유행하였다. 손초도 젊은 시절 죽림칠현처럼 속세를 떠나 산속에 은거하기로 작심하고 절친 왕제(王濟)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상을 벗어나 자연과 어울리면서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아 살겠네(漱石枕流)."
이 말을 들은 왕제가 웃으며 실언임을 지적했다. "어떻게 흐르는 물을 베개 삼고 돌로 양치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손초는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고 돌을 베개 삼겠다(漱流枕石)'고 하려다가 말이 헛갈린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손초는 말을 바꾸지 않고 다음과 같이 둘러댔다.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는 것은 쓸데없는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씻기 위해서이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닦기 위해서라네."
이 고사에서 유래한 성어 '수석침류(漱石枕流)'는 말을 잘못해 놓고는 고치지 않고 그럴 듯하게 둘러대거나 남에게 지기 싫어서 고집을 부리는 행태를 비유한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태 초기에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면 끝날 일을 임기응변으로 모면하려 하고 심지어 내가 잘못한 게 뭐냐고 버티면서 일을 키운다. 검찰의 행태가 바로 그와 같다. 이재용 회장에 대한 검찰의 상고는 자신들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부리는 몽니에 가깝다.
손초가 말을 바꾸지 않아 후세에 이야깃거리를 남겼다면, 말을 밥 먹듯 자주 바꿔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말을 바꾸지 않는 것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습관적인 말 바꾸기다. 어제 한 말 다르고 오늘 하는 말이 다르면 신뢰의 위기가 발생한다. 말 바꾸기에 관한 한 이재명 대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박근혜를 존경한다고 했더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는 말은 필요에 따라 안면몰수하고 말을 바꾸는 이재명식 화법을 상징한다.
반도체 특별법만 해도 그렇다. 이 법의 핵심은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이다.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크게 훼손한 주 52시간제는 소득주도성장 정책, 부동산 정책과 더불어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 경제 실정으로 우리나라가 반도체 초격차를 회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풀어야 할 족쇄다. 이재명 대표는 조기대선을 염두에 둔 우클릭 행보의 일환으로 예외 적용에 대한 전향적 태도를 보였다가 노동계가 반발하자 냉큼 말을 바꿨고 반도체 특별법 여야 합의는 무산됐다.
여론의 따가움을 의식한 이재명 대표가 뒤늦게 근로시간 특례, 즉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을 빼고 합의하자고 나섰지만, 그 조항을 뺀다면 최상목 권한대행 말마따나 반도체 특별법은 보통법으로 전락한다. 이 문제로 정치권이 실랑이하는 사이에 메모리 반도체 기술이 중국에 따라잡혔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온나라를 강타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80, 90년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이 일본을 몰아냈던 것과 비슷한 일이 한국에 벌어지고 있다”고 전한 게 불과 3주 전이다.
어제는 우클릭하고 오늘은 좌클릭한다. 이쪽에서 한 말을 저쪽에 가서 뒤집는다. 이재명 대표의 말 바꾸기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친다. 자신의 본심이 무엇인지 본인도 모를 거라는 항간의 우스갯소리를 이 대표는 예사롭게 넘겨선 안될 것이다. 수시로 말을 바꿔 신뢰의 위기를 자초하느니 차라리 손초처럼 억지를 부릴지언정 말을 바꾸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을 성싶다. 신뢰리스크는 이 대표의 대권가도에 사법리스크보다 더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게 분명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말이 문제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지난 2월 하순 몇몇 신문에서 반도체 관련 기사와 사설 제목들을 추려 보니 위와 같았다. 하나같이 한국경제를 이끌어가는 반도체에 대한 걱정과 경고 일색이다.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프는 관세 협박 카드로 목을 죄어 오고 후발주자 중국은 기술 굴기를 이루며 반도체 대부분의 기초역량에서 우리를 따라잡았다. 잠자고 있던 일본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며 반도체 부활 총력전에 나섰다. 글로벌 패권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반도체는 국가대항전으로 변하고 있다.
한달 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부당합병 및 회계부정 의혹 재판에서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2016년부터 장장 9년을 끌어 온 이 회장의 사법리스크는 고스란히 삼성의 경영리스크가 되어 왔다.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 반도체 대응에 뒤쳐져 위기에 빠진 것도 파운드리 사업이 부진한 것도 거함을 진두지휘하며 적시에 결단을 내려야 할 이재용 회장의 발목을 잡은 사법리스크 탓이 컸다.
반도체가 흔들리면 나라 경제가 흔들린다. 삼성의 위기는 한국경제의 위기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검사 시절 이 사건의 수사와 기소를 주도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이재용 회장의 2심 무죄 판결 이후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국민께 사과드린다"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회장에 대한 수사가 무리였음을 사실상 시인한 것이라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상고해도 결론이 바뀔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었다. 그럼에도 검찰은 기어이 대법원 상고를 결행했다. 이재용 회장의 사법리스크는 온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책임경영을 위한 등기임원 복귀도 불발됐다.
이 말을 들은 왕제가 웃으며 실언임을 지적했다. "어떻게 흐르는 물을 베개 삼고 돌로 양치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손초는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고 돌을 베개 삼겠다(漱流枕石)'고 하려다가 말이 헛갈린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손초는 말을 바꾸지 않고 다음과 같이 둘러댔다.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는 것은 쓸데없는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씻기 위해서이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닦기 위해서라네."
이 고사에서 유래한 성어 '수석침류(漱石枕流)'는 말을 잘못해 놓고는 고치지 않고 그럴 듯하게 둘러대거나 남에게 지기 싫어서 고집을 부리는 행태를 비유한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태 초기에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면 끝날 일을 임기응변으로 모면하려 하고 심지어 내가 잘못한 게 뭐냐고 버티면서 일을 키운다. 검찰의 행태가 바로 그와 같다. 이재용 회장에 대한 검찰의 상고는 자신들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부리는 몽니에 가깝다.
손초가 말을 바꾸지 않아 후세에 이야깃거리를 남겼다면, 말을 밥 먹듯 자주 바꿔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말을 바꾸지 않는 것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습관적인 말 바꾸기다. 어제 한 말 다르고 오늘 하는 말이 다르면 신뢰의 위기가 발생한다. 말 바꾸기에 관한 한 이재명 대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박근혜를 존경한다고 했더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는 말은 필요에 따라 안면몰수하고 말을 바꾸는 이재명식 화법을 상징한다.
반도체 특별법만 해도 그렇다. 이 법의 핵심은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이다.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크게 훼손한 주 52시간제는 소득주도성장 정책, 부동산 정책과 더불어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 경제 실정으로 우리나라가 반도체 초격차를 회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풀어야 할 족쇄다. 이재명 대표는 조기대선을 염두에 둔 우클릭 행보의 일환으로 예외 적용에 대한 전향적 태도를 보였다가 노동계가 반발하자 냉큼 말을 바꿨고 반도체 특별법 여야 합의는 무산됐다.
여론의 따가움을 의식한 이재명 대표가 뒤늦게 근로시간 특례, 즉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을 빼고 합의하자고 나섰지만, 그 조항을 뺀다면 최상목 권한대행 말마따나 반도체 특별법은 보통법으로 전락한다. 이 문제로 정치권이 실랑이하는 사이에 메모리 반도체 기술이 중국에 따라잡혔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온나라를 강타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80, 90년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이 일본을 몰아냈던 것과 비슷한 일이 한국에 벌어지고 있다”고 전한 게 불과 3주 전이다.
어제는 우클릭하고 오늘은 좌클릭한다. 이쪽에서 한 말을 저쪽에 가서 뒤집는다. 이재명 대표의 말 바꾸기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친다. 자신의 본심이 무엇인지 본인도 모를 거라는 항간의 우스갯소리를 이 대표는 예사롭게 넘겨선 안될 것이다. 수시로 말을 바꿔 신뢰의 위기를 자초하느니 차라리 손초처럼 억지를 부릴지언정 말을 바꾸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을 성싶다. 신뢰리스크는 이 대표의 대권가도에 사법리스크보다 더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게 분명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말이 문제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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