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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노동이 문장이 되는 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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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 작가
입력 2025-03-07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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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 작가]
[이두수 작가]
호이스트를 기다리는 노동자
생각보다 호이스트가 빨리 오지 않나보다
그는 쉼 없이 버튼을 눌러대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댔다
그런다고 기계가 빨리 올리가 없다는 것을 알텐데도
저렇게 짜증을 내는 것은
그의 마음이 허기졌기 때문일 것이다
[호이스트를 기다리는 노동자: 생각보다 호이스트가 빨리 오지 않나 보다. 그는 쉼 없이 버튼을 눌러대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댔다. 그런다고 기계가 빨리 올 리 없다는 것을 알 텐데도 저렇게 짜증을 내는 것은 그의  마음이 허기졌기 때문일 것이다.] 

광주 일곡 현장에서 새로운 동료를 만났다. 그는 나보다 다섯 살쯤 더 많았지만 친구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는 늦게 시작한 신앙생활 덕분에 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고 했다. 그의 간증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그 경험을 글로 써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글을 써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난색을 표했다. "지금 나한테 한 이야기를 그대로 글로 쓰면 된다"고 했지만 그는 망설였다.
"근데 명사가 뭐예요? 학교 다닐 때도 동사, 형용사 같은 문법 용어를 몰라서 문법 자체가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그는 공부와 인연이 없었다며 일찍부터 몸을 쓰는 일을 찾아 나섰다고 했다.
명사: 존재를 인식하는 것
명사란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존재를 인식하려면 이름이 필요하고, 그 존재에 이름을 붙여준 것이 명사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후 그가 무엇을 하나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나 보시려고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세기 2:19)
아담이 자연 만물에 이름을 붙여준다. 나무, 돌, 산, 바다, 하늘처럼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명사다. 보이지 않는 것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다. 행복, 마음, 생각도 명사다.
인간 창조에 대한 또 다른 신화가 있는데 로마신화에 쿠라Cura 여신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쿠라는 강을 건너다가 진흙을 보고 그것으로 조심스레 어떤 형상을 빚기 시작한다. 쿠라는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에게 자신이 빚은 작품에 생명(혼)을 불어넣어 달라고 청한다. 유피테르는 쿠라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면서 자신의 이름을 붙여 주려 하자 둘이 옥신각신하는데, 이번엔 대지의 여신 텔루스가 벌떡 일어나 끼어들었다. 결국 셋은 시간의 신 사투르누스를 판관으로 불러 분쟁을 해결해 달라고 청했다. 사투르누스가 내놓은 중재안은 이러했다. "유피테르, 당신은 피조물에게 혼을 주었으니 그가 죽은 후 혼을 가져가시오. 텔루스는 몸을 주었으니 죽은 후 그 몸을 돌려받으시오. 그리고 쿠라는 맨 처음 그 형상을 빚었으니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가지시오. 다툼거리가 된 그 형상은 후무스Humus(흙이라는 라틴어)로 만들어졌으니 이름은 호모homo라고 합시다."
성서나 로마신화나 인간은 흙에서 비롯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처음 사람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토인土人인 것이다.

존재란 이름을 붙여줄 때 의미가 있다. 이름이 없는 존재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김춘수의 시 _꽃_을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존재를 인식하고, 본연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동사: 움직이며 의미를 찾는 것
이제 이 토인이 어떻게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가는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를 내보이는 행위를 하면서다. 이 토인이 노동을 통해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한자 人間의 간은 사이 관계를 의미한다. 내적인 영혼이나 무형세계와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를 구성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 온 것이다.  움직이다, 일하다, 먹다, 자다, 입다, 싸다 이 모두가 다 동사다. 할석이 주로 하고 있는 자르고, 깎고, 쪼고, 가는 행위도 모두 동사인 것이다. 즉 동사는 움직이고 행동하며 의미를 찾는 것이다. 나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노동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명사가 존재를 규정한다면 동사는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다. 인간이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곧 동사의 역사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사회를 구성하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다. 움직이고, 일하고, 먹고, 자고, 입고, 짓고, 가꾸는 모든 행위가 동사다.
노동이란 명사지만 본질적으로 동사다. 노동은 움직임이며,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 자신의 의미를 찾아간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이는 곧 동사가 사라지는 것이며, 노동하는 인간이 점점 소외되는 불안으로 이어진다.
한승태 작가의 책 <어떤 동사의 멸종>에서 그는 특정 직업이 사라지는 것을 단순한 산업 변화가 아니라 '그 노동을 통해 성장하고 완성되던 인간이 사라지는 일'로 본다. 노동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삶의 문장이다. 그리고 그 문장을 어떻게 써 내려갈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형용사: 노동에 감정을 더하는 것
형용사는 명사의 태도나 성질을 말한다. 삶이 문장이라고 할 때 명사와 동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나는 일하고 먹고 싸고 자는 것이 전부일 수가 없다. 어떤 느낌,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형용사는 노동에 감정을 더하는 것이다. 노동에도 감정과 태도가 스며든다. 같은 노동이라도 어떤 느낌과 태도로 임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18세기 초 영국의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이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재건할 때 세 명의 석공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석공은 "돈을 벌기 위해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 석공은 "건축을 하기 위해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세 번째 석공은 "저는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이 부족한 사람이 석공 일을 배워 거룩한 성전을 짓는 데 한몫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태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이 된다. 노동이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의미 있는 과정이 될 수 있는 이유다.
부사: 삶의 윤활유
삶에는 행동과 느낌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동에도 활력과 리듬이 필요하다. 건설 현장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다.
"일을 아리까리하게 하면 안 되잖아요." "꼼꼼하게 일해야지, 설렁설렁 대충 하면 사고 나요."
여기서 '아리까리하게' '꼼꼼하게' '설렁설렁' 같은 말이 부사다. 부사는 문장에 생동감을 주듯 노동에도 변화를 만든다. 부정적이긴 하지만 ‘빨리 빨리, 대충대충, 얼렁얼렁’ 때로는 긴 문장이 필요 없이 이런 말 한마디에도 충분히 의미는 전달된다.

노동이 글이 되는 세상
카를 마르크스는 '노동의 소외'가 노동자에게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친다고 썼다.
노동자는 일에서 자신을 긍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자신을 부인한다. 비참하고 불행하다고 느낀다. 자유로운 정신적·심리적 에너지를 개발할 수 없다. 육체를 손상시키고, 마음을 황폐하게 한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일하지 않을 때에만 자신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일하는 중에는 자신을 못 느낀다. 일하지 않을 때는 마음이 편안하지만 일하고 있을 때는 마음이 불편하다. 그러므로 그의 노동은 자발적이지 않고 강요된, 즉 강제노동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을 통해 내적 만족을 얻지 못한다. 노동은 단지 외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이다.
정말 그런가. 노동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노동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알고(명사), 의미 있는 행동을 하며(동사), 삶의 태도를 만들고(형용사), 활력과 변화를 더한다(부사).
노동이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문장이다. 그리고 그 문장을 어떻게 써 내려갈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일하는 노동자들이 노동의 의미를 깊이 고민한다면 앞으로 더 많은 노동자들이 글을 쓸 것이다. 생각이 깊어지면 철학이 되고, 그것에 자기 감정을 표현하면 시와 수필이 되고, 상상력을 더하면 소설이 된다. 이런 표현이 현장에서도 자유로워지고 풍부해진다면 그만큼 현장은 더 안전하고 즐거워지지 않을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기술과 문명)을 주었고, 이는 노동과 창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에피메테우스는 사후적으로만 깨닫는 어리석은 자로, 무책임한 선택의 대가를 치른다. 이처럼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미래를 내다보고 창조적으로 일할 것인가, 아니면 에피메테우스처럼 무의미하게 시간만 보낼 것인가. 노동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고, 자신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노동이 소외나 먹고 살기 위한 단순한 일이 아니라 한 편의 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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